[사설] 시대착오적 ‘대기업집단 지정제’ 언제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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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호 30면

대기업집단 편입기준 5조원 15년째 그대로

총수 개념 모호하고 친·인척 범위 너무 넓어

전·현직 관료만 좋아할 규제 전면 재검토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이 제정된 건 1980년 말이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던 신군부가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통과시켰고 이듬해인 1981년 4월 시행됐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경제헌법의 기능과 위상을 갖는 공정거래법이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국보위에서 제정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공정거래법의 대기업 규제는 낡은 규제다. 공시대상기업집단 편입기준인 자산 5조원 이상은 2009년부터 15년째 그대로다. 그동안 한국의 경제 규모는 2배 가까이 커지면서 규제 대상은 2009년 48개에서 올해 88개로 늘었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274개의 규제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최대 342개의 규제를 받는다. 규제가 부담스러운 기업이 성장을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을 조장한다는 지적은 괜한 걱정이 아니다.

기업 규모가 크다고 규제하는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다. 대기업 규제가 처음 도입된 1980년대는 국내 시장이 중요했고 지금보다는 해외와 덜 연결된 경제였다. 하지만 이제 한국 기업은 글로벌 기업이 됐다. 2022년 한국의 시가총액 100대 기업의 해외매출 비율은 평균 52.5%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매출의 84%를, 현대자동차는 매출의 69%를 해외에서 벌었다. 이런 개방경제 시대에 국내 기업의 ‘몸집(자산)’만으로 규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해외기업과의 역차별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규제 준수비용이 과도하다는 점이다. 대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동일인(총수)의 관련인은 주식 보유 등을 신고해야 하는데 친족의 범위가 너무 넓다. 챙길 게 너무 많다는 불만이 커지자 공정위는 2022년 말 친족의 기본 범위를 ‘혈족 6촌 이내, 인척 4촌 이내’에서 ‘혈족 4촌 이내, 인척 3촌 이내’로 축소했지만 여전히 가족과 친족의 유대가 약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총수 있는 기업집단 78곳에서 자료 제출 의무가 있는 친족은 5000명이 넘는다. 총수 1명이 평균 친·인척 70여 명의 주식 소유 현황 등을 제출해야 하는 셈이다. 자연인인 동일인에게 법적 근거 없이 친척과 임원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부담을 지우고 자료가 누락되면 검찰 고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도하고 불합리한 규제다.

요즘엔 4촌들과 연락이 끊겼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자매 간에도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세상이다. 직계가족 이외에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친족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보고해야 하는 건 기업에 큰 부담이다. 동일인 개념 자체도 모호하고 법적 근거가 없다. 공정위는 친족을 통한 대기업 지배라는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 개혁을 강조하지만 정작 국민이 체감하기는 힘들다. 대기업 규제 같은 덩어리 규제는 놔두고 잔가지만 치고 있어서가 아닌가. 규제가 한번 만들어지면 공무원의 텃밭이 되곤 한다. 비현실적인 규제와 이에 근거한 과도한 처벌이 로펌과 공정위 전·현직 공무원만 좋은 일 시킨다는 비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공정거래법의 과도한 대기업 규제를 상법·세법·자본시장법·금융관련법 등으로 적절하게 분산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 공정위가 독과점·기업결합·공동행위 등을 규제하는 경쟁당국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다. 획일적·사전적인 대기업 규제에서 경쟁 촉진을 위한 선별적·사후적인 규제로 이젠 바꿀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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