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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장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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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재즈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던 대학생 시절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그것도 예술에 기술을 더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될 줄 말이다. 마에바야시 아키쓰구(59) 일본 정보과학예술대학원대학 교수다. 그는 군마현에 의해 최근 산산조각 나 사라진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를 되살려냈다. 소생 방법은 이렇다. 우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앱을 내려받는다. 원래 추도비가 있던 군마의 숲 자리로 가서 앱을 실행해 비추면 추도비가 예전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증강현실(AR) 조선인 추도비’다. 그는 왜, 이런 앱을 만들었을까. 지난 8일 저녁,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2월 일본 군마현 군마의 숲에서 조선인 추도비 철거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일본 군마현 군마의 숲에서 조선인 추도비 철거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군마의 숲에 추도비가 있다는 건 ‘정보’로는 알았어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철거가 이뤄진 것이 이 아이디어를 내게 된 큰 계기였어요.” 2004년 시민들의 손으로 군마의 숲에 세워졌던 비석을 군마현이 지난 1월 말 중장비로 부서뜨린 뒤, 그는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술을 사용해보자’는 생각에 알고 지내던 작가, 교수들과 상의를 해나갔다. 이미 무너지고 없는 추도비. 인터넷에 널려있는 영상과 사진들이 원재료가 됐다. 그는 AR 기술로 재현해내는 사람들을 찾아냈고, 사비를 들여 이번 추도비 앱을 내놨다.

사실 기술적으로만 보면 앱을 사용해 추도비를 집 안 거실에서도 세워볼 수도 있고, 거리에서도 세워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에바야시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군마의 숲’이라는 장소.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는 사라지고 없지만, 오랜 시간 추도비가 있던 장소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추도비 장소가 남아있는 한, 군마현이 추도비를 산산조각내더라도 추도비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셈이다.

20년 전, 시민단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군마의 광산, 군수공장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문구도 새겨넣었다. 부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두 나라의 우정이 싹틀 수 있다는 염원을 담았다.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인을 위한 비는 약 150개. 이렇게 강제로 철거된 비는 군마의 숲 추도비가 유일하다.

이르면 오는 6월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현지사와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의 만남이 이뤄질 전망이다. 이른바 외교의 시간이다. 마에바야시 교수의 말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사람이 만든 물건은 사라져도, 그것이 있던 장소와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