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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막말꾼의 쓸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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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집권 여당이 이렇게 죽을 쑬 수 있을까. 아니 죽 쒀서 남 줬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그나마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선방했기에 이 정도지, 대통령 탄핵 저지선마저 무너질 뻔했다. 국민의힘 진지는 분노의 포격을 맞아 처참히 허물어졌고, 민주당은 성곽을 더 쌓아 올렸으며, 조국 대표는 의병을 규합해 교두보를 구축했다. 투표를 종이 폭탄이라 했던가. 한 위원장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침울하게 물러갔다. 이재명 대표는 드디어 핍박에서 벗어난 듯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싶은데 표정 관리가 어려울 지경이다. 조국은 제3당 대표로 등극한 날 저녁 검찰 청사 앞에서 포효했다. 이번에는 “쫄맀나?”가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를 검찰에 소환하라”는 혁신당 공약이었다.

한동훈 선방에 탄핵 저지선 방어
용산의 속좁은 행보에 마음 닫아
아내 리스크가 휘몰아칠 후폭풍
막말꾼 범법자 막장극 2편 예고

대통령실은 당혹스럽다. 전국을 돌며 스물네 차례나 선심 정책을 남발했는데, 그게 안 먹히다니. 문(文) 정권이 저지른 온갖 폐기물을 치우느라 동분서주했거늘 그게 안 통했다니. 그래도 국민과 대화하려 애썼는데 일방통행이라니. 사실 유례없는 불통 정치의 대명사는 문 정권이었다. 운동권들이 설쳐댔고, 운동권 정책과 수사(修辭)가 남발했다. 시끄럽고 소란한 잡음 속에 공적은 증발했다. 내실 없는 진보였다. 이에 대한 유권자의 응징은 2022년 대통령 선거로 이미 끝났다. 0.79% 신승은 나 홀로 독주에 대한 응징의 결과였다. 유권자들은 리셋 상태에서 새로 들어선 정권을 주시하기 시작했음을 용산만 몰랐다.

용산은 커튼으로 가려졌고, 민심의 화살은 대통령의 뚝심에 튕겨 나갔다. 세월호만큼 비참했던 이태원 참사에 책임질 사람은 없었다. 채 상병 죽음도 해명뿐이었다. 그 뚝심으로 칭찬받을 일을 하긴 했다. 한미동맹 강화, 세금 인하, 규제 완화, 천안함과 전쟁 유족 위로, 북한에 대한 자존심 회복 등등. 정작 용산의 민심 풍향계는 돌지 않았다. 한국 민주화를 특징짓는 그 유명한 ‘청산의 정치’를 조금 자제했더라면 표심은 좀 너그러웠을 것이다. 청산은 새로 등장한 정권의 유혹이다. 전(前) 정권의 실정이 많을수록 청산의 강도는 높아진다. 윤 정권이 독려한 폐기물 처리반은 인적 청산까지 손을 뻗었다. 막말꾼, 범법자, 종북파를 가리지 않았다. 혐의의 눈으로 보면 모두 피의자가 된다. 압수 수색은 일상이 됐다. 윤 정권 탄생을 저지했던 특급 저격수들이 대거 법정에 섰거나 유배를 갔고, 선남선녀를 피의자로 몰아세우는 검찰 방식이 어느덧 정치 양식이 됐다.

필자는 야당이 외친 민생파탄이나 경제 파탄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문 정권보다는 나았다. 야당이 경제를 이념의 늪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심판론이 먹혔는가. 경제는 상수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을 밀어준 2050세대는 누가 집권해도 경제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경제대국 한국에서 경제가 정치에서 떨어져 나온 지 오래다. 대통령에 꼼짝 못 하는 여당, 율사로 무장한 권력집단,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 여덟 차례 특검법 거부, 내부 경쟁자들을 내치는 속 좁은 행보에 유권자들은 마음의 문을 닫았다. 범법자든 막말꾼이든 그들의 거친 입이라도 빌려 죽비처럼 내리치고 싶었던 거다. 심판론이 먹혔던 세간 정서다.

무엇보다 인적 청산을 너무 밀고 나갔다. 이재명 대표의 물증은 2년 넘게 찾는 중이다. 조국 대표는 말과 행동이 달랐는데 가족이 산산조각 났다. 아내와 자식이 범법자로 몰리면 피눈물 난다. 용산의 이런 직선 행보에는 막말꾼의 포화가 제격이다. 천박해도 속 시원했을 거다. 세상의 품격을 처절하게 짓밟았음에도 유권자는 이들을 온전히 국회로 돌려보냈다. 이들을 용도폐기하기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다. 정동영, 추미애 같은 원로가 귀환했다. 막말 저격수들과 함께 ‘재명이네 마을’ 수호 율사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유배 갔던 이성윤, 박은정이 해배돼 돌아왔다.

자, 이제 심판론의 1호 과제, 아내를 구출할 차례다. 감옥에 간 조 대표 부인, 법정을 들락거리는 이 대표 부인. 혐의 여부와 상관없이, 정적(政敵)과 적장(賊將)의 목을 죄는 데 아내를 연루시킨 것은 한국 정치 초유의 행태다. 한국 정서에 어긋난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지만 불공정을 통해 공정을 도모하는 것이 정치의 지혜다. 만약 ‘묻지 마 평등’을 원한다면 대통령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논리에 조 대표와 이 대표는 이심전심 동맹 서약을 맺었다. 조국혁신당 1호 공약인 ‘한동훈 특검법’은 조국과 가족을 꽁꽁 묶은 대리인의 죄를 묻는다. 2호 공약인 ‘김건희 검찰소환’은 ‘너도 당해 보라’는 한풀이 응징이다.

한국 정치가 어쩌다 이 꼴이 됐을까. 정치권의 복수전은 국민을 죽음의 계곡으로 몰고 간다. 마치 로마 시대 검투장처럼 한 사람이 죽어야 끝장이 난다. 관중들은 쓰러진 검투사를 죽이라고 외친다. 아내를 구출하라 - 야권 ‘특명 1호’는 한국 정치에 거친 폭풍을 몰아칠 것이다. 막장극 제2편이 예고됐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