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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정말 민생을 챙기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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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다만 관건은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016년, 경제부처를 담당했던 기자는 당시 이런 문장을 기사 끝에 관용구처럼 붙이곤 했다. 20대 총선이 예상외로 여소야대(與小野大)로 끝나면서다. 이후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마다 국회에서 건건이 제동이 걸리거나 무산됐다. 그러니 기자로서도 ‘안전장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 전 숨 가쁘게 돌아가던 부처들의 분위기도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장관과 차관은 국회에 불려 다니느라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고, 실무자들 새로운 정책 추진은 엄두도 못 낸 채 맥이 빠진 표정들이었다. 여당의 참패로 끝난 지난 10일 총선 결과를 보며 새삼 떠오른 8년 전의 세종 관가의 풍경이다.

민생토론회서 쏟아낸 정책들
여소야대 국회에서 실종 우려
‘일방통행’벗어나 소통 나서야

학습효과일까. 시장에는 정부의 주요 정책들이 ‘공수표(空手票)’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증시에서 특히 예민하게 반응한 건 이른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수혜주들이었다. 대표주자 격인 금융주는 이틀 사이 5% 가까이 내려앉았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나,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 때 세금 혜택을 주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거야(巨野)의 반대에 부딪혀 국회 문턱을 넘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다. 건설업종 주가도 타격을 받았다. 정부의 재개발·재건축 규제 완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폐기 등이 좌초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다. 원전 관련주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 정부의 정책 추진 여건은 크게 악화하는 형국이다. 정치 지형은 더 험악해졌는데,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까지 커지면서다. 중동 지역의 전운이 확산하며 환율과 유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또 미국의 금리인하가 예상보다 늦어지고, 고(高)금리 상황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에 금융시장도 요동을 치고 있다. 선거 이후로 미뤄놓은 숙제도 첩첩이 쌓여있다. 금융시장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최대 뇌관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총동원돼 눌러놓은 물가도 언제 스프링처럼 튀어 오를지 모른다. 자칫 구조개혁 추진은 언감생심, 급한 불만 끄다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임기가 3년이나 남았는데 정부가 수비만 하다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우리 경제도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11일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지나치게 짧고 원론적이란 지적이 있지만, 그래도 해법의 키워드는 담았다. 바로 국정 운영 방식 쇄신과 경제·민생 집중이다. 민생에 여야가 어디 있겠나. 꼭 필요한 정책을 가다듬어 여론을 설득하고 거야(巨野)를 견인해야 한다. 그러자면 ‘민생’의 이름으로 쏟아낸 각종 정책의 옥석(玉石) 가리기도 필요하다. 그 모든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종 토목사업·예타면제 등 선거를 의식한 선심성 다분한 정책들을 걸러낼 수 있다면 우리 경제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개중에는 야당과 접점이 있는 정책들도 꽤 있다. 기업 밸류업프로그램을 예로 들어보자. ‘코리아 디스카운트’ 극복이라는 대의에는 야당도 반대하지 않는다. 머릿수가 중요한 정치권에서 1400만명의 달하는 동학개미의 여론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다만 방법론에서 상대적으로 여권이 기업 활력 제고에 중점을 두는 반면 야권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소액주주권 보호에 관심이 많다. 모두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기에 적절한 정책 조합이 가능한 사안이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지원 정책 역시 여야 사이 교집합이 존재한다.

또 다른 키워드는 국정 운영 방식의 쇄신이다. 다만 단순히 대통령실 비서실장 바꾸고, 장관 몇 명 바꾸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총선 전 24차례나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보여 준 일방통행식, 돌출식 정책 추진을 지양하고 소통과 설득이 우선돼야 한다. 그간은 야당은 물론 관할 부처까지 소외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런 방식은 정책의 일관성을 훼손하고 신뢰를 갉아먹어 장기적으로 부작용을 빚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이 주도한 공매도 전격 금지가 그랬다. 국회에 나와 부작용을 우려하던 금융위원장은 졸지에 말을 바꾼 실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세수 감소 대책도 없이 덜컥 공언부터 하고 나선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총선 결과와 관련한 대국민 메시지를 직접 내놓을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보다 확실한 변화 의지와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해주길 기대한다. 민생과 경제를 위해서 말이다.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