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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기법 대박날 줄 몰랐다"…'엑스맨 97' 작화 그린 이 사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20일 공개된 애니메이션 ‘엑스맨 97’.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미르가 작화 담당으로 참여했다. 사진 디즈니플러스

지난달 20일 공개된 애니메이션 ‘엑스맨 97’.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미르가 작화 담당으로 참여했다. 사진 디즈니플러스

세상을 지키기 위해 뭉친 돌연변이(뮤턴트)들의 이야기를 다룬 ‘엑스맨’ 시리즈가 27년 만에 부활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10부작 애니메이션 ‘엑스맨 97’(X-men '97)은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방영된 미국 마블 애니메이션 ‘엑스맨’의 후속작이다.

지난달 20일 첫 공개 직후,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항목(평론가 평점) 100%, 팝콘 지수(대중 평점) 94%를 기록하며 호평받았다. 미국 대중문화지 할리우드 리포터는 “향수와 신선함의 완벽한 균형”이라 평가했는데, 30년 가까이 유지돼온 ‘엑스맨’ 시리즈 마니아 층의 깐깐한 기준을 충분히 만족시킨 모양새다.

스튜디오 미르는 ‘엑스맨 97’ 제작에 참여한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종영 시점인 1997년부터 이야기가 새로 전개되는 만큼 90년대 2D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고스란히 재현해내야 했는데, 스튜디오 미르는 작품의 핵심이 되는 작화를 담당했다. 지난 12일 서울 금천구 사무실에서 만난 스튜디오 미르 유재명(52) 대표는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서울 금천구 사무실에서 만난 유재명 스튜디오 미르 대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2일 서울 금천구 사무실에서 만난 유재명 스튜디오 미르 대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인 그는 30여년 전 ‘엑스맨’ 오리지널 시리즈 작화에 참여한 바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요즘 같은 시대에 1997년 제가 고생했던 옛날 작법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점이 걸렸고, 또 트렌드와도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처음엔 거절하려고도 했다”고 말했다. “흥행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잘 될지 몰랐다. 미국은 아버지가 과거에 봤던 작품을 시간이 흘러 아들과 손 잡고 함께 다시 보는 것이 가능한 시장이란 점을 이번에 다시금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장르·작품도 소화 가능한 것이 강점”

유 대표는 1990년부터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했다. 2007년 미국 니켈로디언의 애니메이션 ‘아바타: 아앙의 전설’(이하 ‘아바타’)로 미국 최고 애니메이션상인 ‘애니 어워즈’(Annie Awards)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 부문 감독상을 받은 실력자다. 약 20년의 감독 생활 이후 그는 2010년 스튜디오 미르를 설립했다. 회사를 차린 이유를 묻자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업계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고 답했다.

스튜디오 미르는 ‘엑스맨 97’의 디즈니플러스를 포함해 넷플릭스·워너브러더스 등 굵직한 제작사와 파트너 협업을 통해 차근차근 성장했다. 설립 초반에는 유 대표의 네트워크가 큰 도움이 됐다. 그는 “2012년 ‘아바타’의 속편인 ‘코라의 전설’이 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바타’ 감독인) 제가 차린 회사로 제안이 와서 참여하게 됐다”면서 “‘코라의 전설’은 당시 미국 케이블 채널에서 시리즈물 ‘왕좌의 게임’을 제칠 정도로 큰 반응을 얻었다. 이후 넷플릭스 등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뜨고 나니, 북미 시장 네트워크가 OTT로 옮겨가며 확장이 됐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미르의 첫 제작 작품인,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레전드 오브 코라'. 사진 스튜디오 미르

스튜디오 미르의 첫 제작 작품인,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레전드 오브 코라'. 사진 스튜디오 미르

넷플릭스에선 ‘도타: 용의 피’, ‘위쳐: 늑대의 악몽’, ‘외모지상주의’ 등 다수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마블의 히트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애니메이션 버전을 제작했다. 전세계 9개국이 각 회차를 제작한 디즈니플러스 ‘스타워즈 비전스 2’에 한국 제작사로선 유일하게 참여했는데, 지난 2월 뤼미에르 어워즈(Lumiere Awards)에서 ‘베스트 에피소드 애니메이션’을 수상했다

스튜디오 미르가 꾸준히 굵직한 작품을 제작하는 비결은 뭘까. 유 대표는 ‘유연성’이라고 답했다. “해외 유명 제작사들이 계속 저희를 찾는 이유는 단순히 네트워크 때문은 아니”라면서 “어떤 장르와 작품을 맡겨도 유연하게 수용하고, 만듦새 있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작화 스타일을 보고 따라 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저는 연기가 나거나 불이 타오르는 등 실제 자연의 영상을 보고 스타일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유재명 대표는 "독자적인 IP 개발만큼 중요한 것이 프리프로덕션 등 기본기"라고 강조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재명 대표는 "독자적인 IP 개발만큼 중요한 것이 프리프로덕션 등 기본기"라고 강조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하나의 IP(지적재산)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기본기를 강조했다.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오리지널 IP 개발 없이 미국·일본으로부터 받은 제작 하청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지적이 많은데, 사실 IP는 갖고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라면서 “스토리 틀을 짜고 캐릭터를 만드는 설계 단계의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에서 체력을 키워나가야 IP 개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미르는 첫 작품인 ‘코라의 전설’을 시작으로 프리프로덕션에 공을 들였고, ‘외모지상주의’(넷플릭스) 등 자체 제작도 이어갔다. 최근 ‘스타워즈 비전스 2’는 시나리오와 기획까지 전담했다. 20명 내외의 직원들로 시작한 회사는 현재 직원 200명이 넘는 회사로 성장했다.
유 대표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독자적인 IP 개발을 시작했다. 배트맨·슈퍼맨·드래곤볼 같은 슈퍼 IP가 쉽게 나오지 않지만, 안된다고 겁먹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과거 우주정거장 ‘미르’에 모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주를 탐험했던 전 세계 과학자들처럼 K-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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