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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130년 전 동학농민전쟁이 부른 역사의 소용돌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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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역사 속 한반도의 지정학적 의미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사를 배우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사실이 있다. 한국이 위치한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강한 힘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동시에 양쪽에 있는 두 국가가 서로의 영향력을 해양이나 대륙으로 확대하려고 할 때 한반도를 중간 다리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몽골의 침략이나 임진왜란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다리, 한국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숙명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붙어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한반도는 베트남과 유사한 역사를 경험했다. 유교의 영향을 받았고, 동남아시아 국가와 다르게 대승불교가 전승되었다. 명나라가 망하자 유교적 정통성을 잇는 소중화 국가라는 인식이 나타났던 점도 유사했다.

강국 사이 위치한 한반도, 동아시아 세력 균형서 중요 역할
한반도 둘러싼 힘의 균형 깨질 때마다 역사의 대전환 발생
지역사 및 세계사 변곡점 된 임진왜란, 청일전쟁, 한국전쟁
새 국회,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중심에 놓고 정책 결정해야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한국과 베트남은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양국의 지역 내 조건이 달랐다는 점도 중요하다. 베트남은 한쪽에는 중국과 접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강대국이 아닌 자신보다 약한 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 베트남이 통일한 지 4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던 것은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주도권 다툼과 관련이 있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맹주를 자처해 왔다.

동아시아를 바꾼 한반도

베트남과 달리 한국은 지역의 맹주는 아니었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 힘의 균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힘의 균형을 깨고자 할 때 동북아 전체가 흔들렸고 역사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고구려를 제압하면서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할 때 수당 간의 교체가 일어났다. 일본이 조선을 통해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할 때 중국에서는 명청의 교체가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4년 조선을 둘러싼 패권 경쟁은 또 한 번 동북아시아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그 시작은 농민들의 봉기였다. 조선 정부는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청의 파병을 요청했고, 이는 일본의 개입으로 이어졌고, 결국 청일전쟁으로 확전되었다. 그 결과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수백 년간 지속하여 왔던 조공외교의 종식을 선언하면서 동아시아에 거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강화도 조약과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1조에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하며, 그동안 지속하여 온 조공과 관련된 모든 전례를 중단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음모는 보지 못한 채 사대 외교에서 벗어난 것만 기뻐하며 독립문을 세웠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의미

시모노세키 조약이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대만을 ‘영원히’ 일본에 할여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랴오둥반도를 거쳐 산둥반도의 웨이하이 전투로 이어졌다.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전쟁 종결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자 대만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조약의 조항 내에 대만을 포함하기 위한 일본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에 대한 조차에 실패하면서, 일본의 주도권은 다시 흔들렸다. 결국 10년이 더 지난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일본의 군부가 본격적으로 해외로의 팽창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된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대변환을 볼 때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청나라의 정치지도자였던 이홍장의 역할이다. 이홍장은 세계사적 전환기에 청나라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그가 내렸던 결정들은 이후 청나라가 급격하게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홍장의 실수

이홍장을 첫 번째 잘못된 판단은 대만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일본의 대만에 대한 복속 전략은 1874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오키나와의 어부들이 표류하다가 대만에 상륙했고, 이들이 원주민들에게 학살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군이 대만에 침략하여 원주민 학살을 자행한 것이었다. 이홍장은 영국의 중재로 오키나와인에 대한 학살을 일본인에 대한 학살로 인정하고 배상을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철수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던 오키나와가 일본 소속이 영토임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의 대만 복속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홍장은 오키나와 문제와 갑신정변 직후의 톈진조약에서도 외교적 실수를 저질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오키나와를 복속하자 1879년 그랜트 미국 대통령은 이홍장에게 청과 일본이 류큐를 나누어 통치할 것을 제안했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는 이후 일본의 오키나와 복속이 미국의 태평양에 대한 이해관계와 충돌할 것임을 예측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그랜트의 제안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일본은 오키나와를 복속했다.

갑신정변 직후 톈진조약이 맺어졌을 때도 이홍장은 조선에 파병 시 일본에 통보한다는 조항의 삽입에 동의했다. 갑신정변 상황을 본다면, 청이 일본에 이 정도 양보할 필요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갑오농민전쟁 당시 조선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이 바로 조선에 파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은 일본에 철저하게 패배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는 막을 내렸다.

냉전의 기점이 된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변곡점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이 일본을 파트너로 삼는 역코스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는 국제정세의 변화는 냉전의 중요한 기원이 되었다. 동유럽의 소련의 영향권 편입, 베를린 위기, 그리고 소련의 핵개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냉전의 배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에 대한 김일성과 스탈린의 오판은 냉전 시작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계획에 대해 스탈린은 찬성했고, 여기에는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이 작동했다. 그 시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과 대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이 동아시아와 전 세계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한편으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이 정도로 한반도가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상황이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거스를 수 없는 숙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는 순간 큰 위기감이 다가오기도 한다.

지금도 계속되는 불씨들

2024년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4년 한반도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봉기가 이후 1945년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는 기점이 되었다. 그때 사실을 상기하면, 혹여나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시간이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을 또다시 전쟁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다행히 정전협정 이후 70여년의 기간 동안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면전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의 시점에서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사건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상황이 다시 재발하지는 않겠지만, 위기가 계속된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주도권 싸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은 아직도 소용돌이 속에 있다. 무엇보다도 북핵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우려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올해 초부터 일본 내에서 언급되고 있는 북일 정상회담의 가능성과 올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한반도를 또 다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내일(10일)이면 총선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번 총선의 주목되는 점 중 하나는 대외관계가 논쟁의 초점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숙명으로 인해 살얼음판을 밟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 꾸려지는 국회에 대해 국내정책을 둘러싸고도 경쟁하지 말라 할 수는 없지만, 외교정책에 한해서는 제발 국가 전체의 생존과 이익을 중심에 놓고 정책을 결정해 줄 것을 기대해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