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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뮤지컬·영화 넘나들겠어?"…조정석 헤드윅, 관객 뒤흔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배우 조정석(44)이 8년 만에 뮤지컬 '헤드윅'으로 컴백했다.
2021년엔 코로나19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헤드윅이 객석 의자 위에 올라가 춤추는 시그니처 '카 워시'(car wash) 댄스와 함께다. 지난달 22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한 공연에서 조정석은 쉬는 시간 없이 135분 동안 이어진 무대를 꽉 채우며 관객을 들었다 놨다 했고, 팬들은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로커 '헤드윅'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조정석. 사진 쇼노트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로커 '헤드윅'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조정석. 사진 쇼노트

뮤지컬 '헤드윅'은 모노드라마와 콘서트가 합쳐진 형태의 뮤지컬이다. 막이 오르면 동독 출신의 로커 헤드윅은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 여정을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헤드윅 또는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이 부르는 11개의 넘버는 그들의 굴곡진 인생 스토리와 어우러져 여운을 남긴다.

헤드윅의 본명은 한셀 슈미트. 동독에서 태어난 소년 한셀은 어린 시절 미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다. 냉담한 어머니도 그에게 안식처가 돼 주지 못했다. 헤드윅의 유일한 기쁨은 미군 라디오 방송을 통해 데이비드 보위, 루 리드, 이기 팝 같은 로커들의 음악을 듣는 것. 그런 헤드윅을 향해 미군 병사 루터가 손을 내민다. 그와 함께하기 위해 한셀은 성전환수술을 감행하고, '헤드윅'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수술이 실패해 중요 부위에 작은 살덩이를 달고 살게 된다.

헤드윅을 맡은 한 명의 배우가 2시간 넘는 공연을 사실상 홀로 이끌어간다. 관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애드립으로 토크쇼를 진행하다가 중간중간 파워풀한 넘버와 안무를 선보인다. 거기에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어두운 어린 시절과 성전환 수술에 실패하고 느낀 절망, 연인에게 버림받은 후의 상처까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상대 배우도 없이 연기해야 한다. 그야말로 게스트도 없는 뮤지컬 차력쇼다.

이번 시즌을 포함해 총 5번의 시즌에 참여한 조정석은 섬세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선글라스와 망토 차림으로 '테어 미 다운'(Tear me down)을 부르며 극장 뒷문에서 걸어오는 첫 등장부터 가발과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모두 벗어 던지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마지막까지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펼쳐 보였다.
화려한 가발과 메이크업에 힘입어 자신감을 찾게 됐다는 내용의 노래 '위그 인 어 박스'(Wig in a box)에서는 특유의 섬세한 톤 조절로 쓸쓸한 심경을 전달했다. 특히 그가 ‘미드나잇 라디오’(Midnight radio)를 부르며 이츠학의 상처를 끌어안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팬들이 적지 않았다.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로커 '헤드윅'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조정석. 사진 쇼노트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로커 '헤드윅'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조정석. 사진 쇼노트

순발력 있게 극을 이끌어나가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애교 섞인 말투로 "아무나 뮤지컬과 영화를 넘나들 수 있는 건 아니지"라는 멘트를 던지자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몸을 누가 가장 많이 만졌는지 알아?"라는 그의 질문에 객석에서 "거미(조정석의 부인)"라는 답이 나오자 "걔가 다리가 많긴 하지"라고 응수해 관객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 역의 장은아도 시원한 가창력을 선보였다. 드래그퀸인 이츠학은 '평생 남자로 살라'는 헤드윅의 당부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비운의 인물. 헤드윅은 불현듯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이, 그를 거쳐 간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이츠학을 억압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에게 금발 가발을 건넨다. 망설임 끝에 가발을 받아든 이츠학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헤드윅과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깊은 울림을 준다.

헤드윅이 가발과 의상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는 장면. 극의 하이라이트다. 사진 쇼노트

헤드윅이 가발과 의상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는 장면. 극의 하이라이트다. 사진 쇼노트

배우의 역할이 큰 만큼 캐스팅에 따라 극의 세부 내용이 달라지는 점 또한 ‘헤드윅’의 매력이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헤드윅도 관객의 호응에 따라 애드립이 달라지고, 러닝타임도 제각각이다.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는 러닝타임은 135분으로 공지돼 있지만, 배우에 따라 조금 더 오랜 시간 공연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 때문에 ‘헤드윅’은 유난히 회전문 관객이 많고, 시즌마다 모든 캐스팅을 보는 마니아층도 탄탄하다.

이번 시즌은 관객과 배우의 소통이 적극적으로 이뤄져 실제 콘서트장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배우가 객석으로 내려가 연기하거나 노래할 수 없었고 관객들도 박수만 칠 수 있었다.

무대 영상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각각의 넘버에 맞춰 무대 위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상은 영상 디자이너 정재진의 작품이다. 아날로그 질감의 거친 드로잉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헤드윅의 외로운 내면을 드러냈다. 갈라진 두 존재가 하나로 합쳐지는 비디오 아트 장면은 100개의 초안 중 내부 논의 끝에 하나의 안을 채택했다. 드로잉 작업에만 3개월이 소요됐을 정도로 무대 영상에도 공을 들였다.

헤드윅 역은 조정석·유연석·전동석이, 이츠학은 장은아·이예은·여은이 맡았다. 공연은 6월 23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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