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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징벌적 상속세와의 전쟁, 이제 끝낼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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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하현옥 논설위원

 국내 최대 게임업체인 넥슨의 2대 주주는 기획재정부다.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 지분 29.3%를 보유하고 있다. 2022년 김정주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뒤 유족은 4조7000억원으로 평가된 해당 지분을 정부에 물납했다. 국세는 현금 납부가 원칙이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부동산이나 주식 등으로 납부(물납)할 수 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2대 주주가 된 정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해당 지분을 공매에 넘겼지만 지분 매각은 두 차례나 불발됐다.

 한미약품 그룹의 경영권 분쟁도 5400억 규모의 상속세 때문에 빚어졌다. 창업주의 부인과 딸이 상속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에너지 화학 기업인 OCI그룹과 이종(異種) 통합을 추진하자, 창업주의 두 아들이 이에 반대하며 경영권 싸움으로 번졌다. 주주총회에서 아들 측이 승리를 거두며 통합은 무산됐다. 물론 상속세 재원 확보는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한국 기업은 상속세와 전쟁 중이다. 고(故) 이건희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에 부과된 12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내기 위해 삼성 일가는 주식담보대출 등을 받고 주력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고 있다. 상속세를 내려 회사 경영권을 판 경우도 있다. 밀폐용기업체 락앤락과 손톱깎이업체 쓰리세븐 등이 대표적이다. 상속세 부담에 기업을 처분하려는 협력업체 매물이 늘면서 공급망 관리에 비상이 걸린 현대차가 부품 협력사의 지분 구조와 승계 상황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는 보도도 나왔다.

 상속세가 기업을 옥죄게 된 것은 ‘징벌적 수준’의 높은 세율 때문이다. 한국의 상속세율은 10~50%(5단계 초과누진세율)다. 대기업 최대주주가 지분을 상속할 때는 주식 할증 평가(20%)가 더해져 세율은 최대 60%까지 높아진다. 이 경우 상속세율은 일본(55%)보다 높은 세계 1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개국 상속세 최고 세율 평균(25.8%)의 2.3배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지난해 “상속세 때문에 어차피 셀트리온은 국영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게 무리가 아닐 정도다.

세계최고 수준 상속세 마련하려
물납·매각에 경영권 분쟁까지도
아스트라 사례 반면교사 삼아야  

 게다가 한국의 상속세는 낡은 옷을 입고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물가가 오르고 자산 가치도 뛰었지만 상속세 기준은 20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다. 과표구간별 금액과 일괄공제 금액(5억원)은 2000년 이후 24년째 그대로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서 “상속세 공제 제도를 개편한 1997년 이후 인적공제 한도가 크게 상향되지 않았지만, 2022년 기준 소비자물가지수 증가율은 1997년 대비 89%였다”고 지적했다. 물가와 자산 가치는 뛰는 데 과세 기준이 낡다 보니 납세자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에도 상속세가 수술대에 오르지 않았던 건 대상이 소수인 탓이 크다. 과세 시점이 제각각이다 보니 조세 저항도 크지 않다. 부의 대물림을 막고 부자에게만 해당한다는 인식에 상속세 개선을 주장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세금인 만큼 징세에 유리했던 점도 굳이 손대지 않았던 이유였다.

 상속세가 부의 대물림을 막는 데 효과가 있었더라도, 다른 측면에서는 경제 행위의 왜곡을 가져왔다. 상속 부담을 줄이려 기업이 주가 부양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다.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 등에 소극적이고, 장부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30~40년 전에 사들인 땅값을 현재 회사 가치로 반영하며 자산 재평가를 하지 않는 등 주가를 누르기 위한 각종 ‘꼼수’가 만연했다. 상속세가 자원 재분배를 가로막고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이다.

 징벌적 수준의 상속세는 기업의 영속성을 흔들고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게 세계적인 제약사였던 스웨덴 아스트라AB의 사례다. 1984년 아스트라AB 상속인은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처분했지만 주가 폭락으로 세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결국 영국 제약회사 제네카에 헐값으로 회사를 넘겼다. (이 회사가 현재의 아스트라제네카다.) 당시 스웨덴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70%였다. 과도한 상속세로 스웨덴 기업의 탈출이 가속하며 기업 투자 감소와 실업률 상승 등의 후폭풍이 이어지자 스웨덴 정부는 2005년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를 도입했다.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기업이 상속세와의 전쟁에 힘을 소진하는 건 국가적 낭비다. ‘부자·대기업 감세’라는 프레임에 얽매여 낡고 경직된 상속세 개편을 미루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부의 대물림을 막으려다 기업이 사라지면 더 큰 손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