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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부 개입 필요"…'보이지 않는 손' 멈추자 나타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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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중)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1989) 토드 부크홀츠

"불경기(recession)란 당신의 이웃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불황(depression)이란 당신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경기회복(recovery)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1980년 당시 대통령이던 민주당의 지미 카터를 상대로 대선에 나선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한 말이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감세, 규제 철폐, 정부 지출 삭감, 인플레이션을 누르기 위한 통화 정책을 골자로 한 경제 정책(레이거노믹스)을 펼쳤다. 레이건은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함께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레이거노믹스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기 미국 역사상 최고 호황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크홀츠는 레이건이 공급 중심의 고전경제학을 다시 꺼내든 것을 두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리처드 닉슨에 이르는 모든 미국 대통령이 케인스 넥타이를 맸다면 레이건은 애덤 스미스가 그려진 넥타이를 옷장 구석에서 끄집어내 맨 셈"이라고 평가했다. 경제학자에게 구세주나 다름없는 애덤 스미스는 어쩌다가 1930년에서 80년까지 50년 동안이나 뒷전으로 밀렸을까. 존 메이너드 케인스 때문이다.

존 메이나드 케인스.

존 메이나드 케인스.

성공한 천재 케인스

고전경제학은 "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는 세이의 법칙을 굳게 믿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장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 프랑스어로 읽으면 세, 영어로 읽으면 세이다)는 우리 모두 본인이 생산한 것을 가지고 남들이 생산한 것을 구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의 값어치는 우리가 생산한 것의 값어치와 같다고 봤다. 장기적으로, 그리고 사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생산=소비=소득이니까. 특히 세이가 활동한 19세기 초부터 100년 동안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로 끝없이 시장이 확장하는 시기다. 단기적인 수요 감소나 불황은 있었지만 시장의 확장은 곧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20세기 들어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시장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고, 생산한 제품은 재고로 남았다. 석탄이 팔리지 않아 광부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주머니가 빈 광부들은 석탄을 사지 못해 난로 없이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1929년 10월 24일 월스트리트의 '검은 목요일'을 시작으로 전세계를 강타했다. 그 후 4년 동안 4%던 미국의 실업률은 25%로 치솟았고, 국내총생산은 절반으로 줄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하지 않았다.

케인스가 등장한 것은 이맘때였다.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시험에 통과한 후 마셜의 '경제원론'을 단 8주 동안 공부했다. 케인스가 이 책을 읽고 논문을 써내면 마셜은 여백에 격려하는 글을 적어 돌려주곤 했다. 케인스는 친구에게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국부론'을 썼다는 스미스의 말과 함께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로 꼽힌다. 이래서 천재들은 재수가 없다.

케인스는 1905년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응시자 104명 중 2등을 차지했다.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과목은 수학과 경제학이었다. 케인스는 시험 채점관이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학과 정부를 오가며 실력을 보이던 케인스는 42세던 1925년 러시아의 발레리나와 결혼한다. 또 천부적인 재테크 감각으로 갑부가 됐다. 부크홀츠는 "부자가 되는 것으로 경제학자의 서열을 매긴다면 케인스는 리카도와 수위를 다툴 것이다. 창피하지만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꼴지를 놓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게다"고 평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고 없다

대공황 당시 뉴딜정책을 통해 일자리를 얻은 미국 노동자.

대공황 당시 뉴딜정책을 통해 일자리를 얻은 미국 노동자.

케인스는 1936년 거시경제학 분석의 새 이정표가 되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내놨다. 먼저 세이의 법칙을 공격했다. 세이의 법칙이 작동하려면 금리가 유연하게 움직여 저축을 투자로 연결하고, 임금과 물가가 유연하게 소비 감소에 대응해야 한다. 재고가 쌓이면 투자가 줄어 금리가 낮아지고, 임금 역시 줄면서 과잉생산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공황에서 나타났듯이 저축은 기업의 투자로 바로 연결되지 않았고, 임금 역시 쉽게 변동하지 않았다. 임금과 물가가 조정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장기적인 불경기나 불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인스가 고전학파의 논리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저축과 투자, 임금과 물가가 유연하게 반응하는, 즉 확실성을 갖춘 특수한 상황에서만 작동한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는 자신의 이론이 특정 상황에서만 유효한 '특수이론'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실제 세상을 설명하는 '일반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 불황을 타개할 방법은 금리 인하가 아니라 정부지출이다. 지출 증가는 승수효과에 따라 증폭된다. 정부가 100원을 들여 화장실을 만들면 배관공, 미장공 등이 임금을 받게 된다. 이들이 절반을 생활비로 쓰면 시장에는 50원이 추가로 풀린다. 이런 연쇄 반응을 통해 국가 전체로 봤을 때 100원의 지출은 200원의 소득 증가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소득의 3분의 2를 소비한다면 승수효과는 3배로 늘어난다. 이처럼 정부지출로 불황을 타개할 수 있다. 대공황 당시 미국에서 사회기반시설을 만드는 뉴딜정책을 펼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케인스주의 덕분에 경제학은 토머스 칼라일이 붙였던 모욕적 별명인 '우울한 과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64년 미국 경제가 침체 기미를 보이자 린든 존슨 행정부의 경제고문들은 자신 있게 케인스식 처방전을 내놨다. 불경기 폭은 300억 달러, 승수가 2.3인 것을 파악해 130억 달러의 세금을 삭감했다. 경제는 활기를 되찾았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장기적으로 정부지출 확대가 민간투자를 줄여(구축효과)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케인스의 답변은 명쾌했다. "그X의 장기적 관점이 현재 상황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고 없다(The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사실 케인스는 1946년에 죽었고 이 말을 한 것은 1923년 내놓은 '화폐개혁론'에서다. 당대의 경제학자들은 단기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으로 저절로 사라진다고 봤다. 케인스는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관점 자체가 잘못됐다는 근본적인 답을 내놓은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케인스는 그만큼 천재였고, 그래서 그만큼 재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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