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화공간 된 일제 수탈 상징…"아픔 잊지 않되 미래동력으로"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84호 14면

“역사적 공간인 헤레디움에서 젊은이들이 영감을 받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길 바란다”는 황인규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이사장. 최기웅 기자

“역사적 공간인 헤레디움에서 젊은이들이 영감을 받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길 바란다”는 황인규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이사장. 최기웅 기자

일제강점기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는 식민지 수탈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일제는 국책회사인 동척을 설립하고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했다. 전국에 모두 9개였던 동척 건물은 현재 대전·부산·목포 3곳에 남아 있다. 이중 대전 건물은 지난해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거듭났다. 민간에 매각돼 타일상점 등이 입점해 있던 것을 한 기업이 사들여 오랜 고증과 분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라틴어로 ‘물려받은 토지’란 뜻의 헤레디움은 지난해 9월 공식 개관 이후 클래식 음악 공연과 현대미술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동척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황인규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이사장은 24년간 검사로 일하다 기업인으로 변신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검사 시절 박수근·이중섭 화백의 위작 사건을 수사하다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왜 하필이면 아픈 역사의 현장인 동척을 선택해 문화공간으로 꾸민 것일까.

대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옛 모습(1922년). [사진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대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옛 모습(1922년). [사진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왜 동척 건물을 복원했나요.
“대전은 일제강점기 철도가 놓이면서 신도시로 발전한 곳입니다. 6·25 전쟁 등을 거치며 근현대 건축물이 많이 소실됐는데, 대전 동척 건물은 다행히 보존돼 있었죠. 역사적 공간인만큼 공공의 목적을 가진 공간으로 쓰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제 잔재는 철거하는 게 옳다는 시각도 있는데요.
“처음에는 좀 망설였어요. 아픈 과거를 가진 곳이잖아요. 하지만 후손에게 어떻게 남겨질까를 생각했습니다. 100년 후에도 우리 후손이 이곳을 아픈 과거의 공간만으로 바라볼까요? 대전 동척은 1922년 지어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공간입니다. 그중 일본인들이 사용한 시간은 1945년 광복 때까지 23년 정도에요. 이제 우리는 강한 나라입니다.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되, 상처에만 매달리지 않고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대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복원한 현재 모습. [사진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대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복원한 현재 모습. [사진 씨엔씨티 마음에너지재단]

복원 과정은 어떠했나요.
“건물을 인수하고, 전문가 자문을 받아 복원을 하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2004년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어서 개발 관련 허가도 신경 써야 했고요. 무엇보다 어려운 건 옛 자료를 구하는 것이었어요. 이 건물을 지은 회사가 일본에 있어 설계도를 요청했지만, 관동대지진 때 사라졌다며 주지 않았죠. 그래도 운이 좋았던 건 이 건물이 타일가게로 사용되면서 기둥 등에 붙여진 타일을 뜯어내니 일부는 원래의 모습이 남아 있었어요. 지붕 천장도, 유리창도 100년 전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문화공간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전은 과학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죠. 과학과 예술이 한 뿌리라고 생각해요. 공통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발견하는 것을 추구하니까요. 미술관을 통해 젊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헤레디움을 통해 관람객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아파트 평수와 어느 동네에 사는지가 삶의 척도가 되면 우울하지 않겠어요? 비교 문화가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생각을 키워주는 공간을 자주 접하면 좋겠습니다. 미술관을 자주 찾고, 집 안에서 작은 화단을 가꾸고요. 본질을 찾아가는 것, 삶의 질을 높여가는 것. 문화를 통해 한국도 충분히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레디움에서는 지난 3일부터 일본 출신 현대미술작가 레이코 이케무라의 국내 첫 전시가 열리고 있다. 8월까지 열리는 ‘수평선 위의 빛(Light on the Horizon)’전이다. 회화, 조각, 설치작 등 이케무라의 지난 10년간의 작품 총 30여 점이 소개된다. 황 이사장은 “일본과 관련된 아픔이 있는 공간에서 일본 작가의 전시를 여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고민도 했지만, 과거를 품되 매달리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