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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국수집 음악에도 T.P.O가 필요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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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호 30면

서정민 중앙SUNDAY 문화선임기자

서정민 중앙SUNDAY 문화선임기자

얼마 전 강남의 한 유명 국수집에 들렀을 때다. 여느 평범한 국수집과 달리 모던한 인테리어가 세련돼 보이는 매장에선 실내 음악으로 국내 모 여가수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이 노래가 대략난감이었다. TV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험난한 사랑을 표현하는 OST로 깔린다면 딱 좋을, 그러니까 창법이나 목소리가 꽤나 애절하게 끓는 곡이다. 산뜻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할 국수집에서 듣고 있자니 귀에 거슬렸다. 볼륨은 또 왜 그렇게 큰 건지. 이 곡을 실내 음악으로 선택한 젊은 직원들에게는 일하면서도 계속 듣고 싶은 핫한 노래소리겠지만, 국수 가락 넘길 때마다 귀와 머리가 띵해지는 손님에게는 그저 소음일 뿐. 만약 그때 “저기요, 웬만하면 T.P.O(시간·장소·상황)에 맞는 음악을 틀어주세요”라고 했다면 직원들은 뭐라고 답했을까.

공간마다 어울리는 음악·볼륨 달라
배려 없이 키운 욕심이 논쟁 원인

패션에서 T.P.O에 맞는 옷차림은 어느 정도 공유된 에티켓이다. 상가나 결혼식장에 등산복 바지를 입고 나타난다면 질타 받아 마땅하다는 데 누구나 공감한다. 그런데 공간에 어울리는 음악과 데시벨(소음 단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래 전 한 남성 패션잡지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도산공원, 한강둔치, 올림픽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야외공간의 현장 소음 레벨을 측정해 조용히 산보를 즐기거나 데이트 하기 좋은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패션 뿐 아니라 공간에도 T.P.O에 맞는 음악과 데시벨이 필요하다. 백화점과 예식장, 도서관과 시장, 식당과 게임장의 목적·콘텐트·고객은 다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일제히 열어젖힌 쇼핑 공간들의 무자비한 음악 소리가 거리로 넘쳐 흠칫 놀랄 때가 많다. 쇼핑을 하라는 건지, 어서 나가라는 건지. 요즘 젊은이들의 음악 취향을 잘 모르는 꼰대의 불만이라 하지 마시라. 쇼핑하러 들어왔다가 음악 데시벨에 놀라 매장을 나가는 젊은 친구들도 여럿 봤다.

요즘 같은 때 공간 마케팅에서 필요한 것은 고객을 위한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접대)’다. 좋은 서비스 콘텐트는 물론이고 이 공간에서 고객이 듣고 싶은 음악은 뭘까, 고민하지 않는 주인은 고객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여전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하고 있는 ‘노키즈존’ ‘노시니어존’ 문제도 서로의 배려심 부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온 식당을 뛰어다녀도 아랑곳 않고 자기들 먹는 데만 급급해 아이를 제지하거나 타이르지 않는 무심한 부모들이 있다. 이들은 모처럼 기분 전환을 위해 혹은 뭔가 특별한 이유로 그 식당을 찾은 다른 손님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 이야기를 듣지 않고, 제 이야기만 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서로 제 이야기만 하려니 목에 핏발이 서고 말소리는 계속 커질 수밖에. 한술 더 떠서 ‘못된’ 시니어들은 종업원들에게 반말까지 하며 막 대한다. 이들은 그 공간에서 일하는 이들과 옆자리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2008년 출판된 시집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선운사 가는 길』은 불문학자·번역가인 김화영 교수가 선운사와 관련된 현대시와 한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중 김소연 시인의 시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선운사에 상사화를 보러 갔다’가 있다.

시인은 꽃이 지고 잎이 나는 소리를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었다고/ 지금은 그렇게 적어둔다’고 했다. 선운사 가는 길은 꽃이 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야 한다. 그게 그 공간을 찾은 이들이 바라는 바다.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발자국 소리조차 조심조심 배려하는 마음은 도시의 공간들에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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