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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망 앓던 치매 노인의 난데없는 살인…대법, 유죄선고 못 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 중증 치매환자 전담병원 내부 이미지.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연합뉴스

한 중증 치매환자 전담병원 내부 이미지.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연합뉴스

섬망(譫妄·Delirium) 증세를 보이던 70대 치매 환자가 이유 없이 다른 환자를 공격해 숨지게 한 사건에서 그를 형사처벌 할 수 없다는 법원의 최종적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달 12일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된 A씨(77)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2021년 8월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알콜성 치매 환자 A씨는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다. 간호조무사들이 그를 발견해 제지했다. A씨는 돌연 출입문 쪽에 놓여있던 철제 소화기를 들어 옆 침대 환자의 머리 쪽을 수차례 내리쳤다. 자다가 난데없이 공격을 당한 80대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도대체 A씨가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A씨는 이 병원에 일 년 넘게 입원해 있었는데 그를 돌봐 온 간호사나 요양보호사는 A씨가 피해자를 공격할 이유나 동기가 전혀 없거나 모르겠다고 했다. A씨를 진료해 온 병원장은 “망상이 아니고서는 A씨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다. 중증 치매로 인한 망상, 즉 섬망 증세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A씨를 감정한 의료진도 그가 “사건 전부터  일시적 혼돈 상태를 보이는 섬망이 빈번히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견이었다. 사건 이후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에서 A씨를 19일간 입원시켜 지켜본 뒤 내린 판단이었다. A씨는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몇 시이며 저 사람이 누구인지 등을 아는 인지력까지 상당히 떨어져 스스로 일상생활이 힘든 ‘중증의 인지장애’ 수준으로 평가됐다.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형법 10조는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의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A씨의 심신장애가 어느 정도였는지가 재판의 주된 논점이 됐다. 법원이 반드시 전문감정인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판사들이 보기에도 A씨의 경우는 검찰이 주장하는 것처럼 ‘심신미약’ 정도에 그치지 않았고 ‘심신상실’로 판단됐다.

A씨는 환갑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8년 처음 알콜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2018년에는 머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이 때 이후 치매 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A씨는 치매 때문에 지난 십여년 간 여섯 차례 입퇴원을 반복했고 이번이 일곱 번째 입원이었다. A씨는 사건 당시 출동한 경찰에게 A씨는 자신의 이름도 말하지 못했으며 의사능력 문제로 자신의 첫 공판에 나오지도 못했다.

부산지법 서부지원 형사1부(부장 이진재)는 지난해 4월 A씨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검찰이 항소했으나 같은 해 12월 부산고법 형사2-1부(부장 최환)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지난달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로 확정됐다.

A씨는 현재 다른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검찰은 A씨가 재범의 위험이 있다며 치료감호청구도 했으나 법원은 필요하지 않다고 봤다. 개인 위생이나 식사 등 기본적인 일상생활 유지가 불가능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어 치료감호시설보다 요양시설에서의 관리가 더 낫다고 본 것이다. 또 A씨의 가족들이 A씨에 대해 지속적인 보호와 치료를 다짐한 점도 감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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