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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캠퍼스 커플, 지금은 복지관 커플’…어르신의 위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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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대상 수상자 성백광(왼쪽 두번째)씨와 최우수상 수상자 김행선(왼쪽 세번째)씨. 홍지유 기자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대상 수상자 성백광(왼쪽 두번째)씨와 최우수상 수상자 김행선(왼쪽 세번째)씨. 홍지유 기자

“아내가 몸이 아파 식사 준비를 못 합니다. 그래서 가끔 복지관에서 함께 밥을 먹지요. 아내 손을 잡고 복지관에 가다가 젊은 시절 함께 대학 교정을 걷던 추억이 떠올라 시를 쓰게 됐습니다.”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성백광(62)씨의 시 ‘동행’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내의 닳은 손등을/오긋이 쥐고 걸었다/옛날엔 캠퍼스 커플/지금은 복지관 커플’

네 줄의 짧은 문장 안에 청춘부터 긴 세월을 함께한 부부의 추억이 담겼다. 심사위원단은 “‘닳은 손등’ ‘오긋이’와 같은 단어가 지은이의 심정을 대신해 준다”며 “서정적이면서도 오랜 서사가 깃든 좋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한국시인협회와 대한노인회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시 공모전’ 시상식이 3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노인회 사무실에서 열렸다. 주최 측은 전국에서 투고된 5800여 편의 작품 중 대상과 최우수상 각 한 편을 선정했다. 김종해 시인, 나태주 시인, 유자효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심사를 맡았다.

대상을 받은 성씨는 정년 퇴직을 앞둔 고등학교 교사다. 그는 이날 시상식에서 “식사 시간이 되면 배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복지관 앞에 길게 늘어선다”며 “처음에는 복지관을 늘려야 한다는 내용의 시를 쓰려다가 마감 직전에 마음을 바꿔 ‘동행’을 썼다. 여러 번 다듬은 시보다는 즉흥적으로 쓰인 시가 더 울림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최우수상을 받은 김행선(70)씨의 ‘봄날’은 세 문장에 삶의 아이러니를 녹여낸 작품이다. ‘죽음의 길은 멀고도 가깝다/어머니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나를 돌아본다/아!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은퇴 이후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씨는 이날 시상식에서 “어머니가 100세를 넘기셨을 때, ‘내가 엄마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안 좋아서 어떡하나’ 생각하다가 떠오른 시”라고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다는 것이 봄날

살아있다는 것이 봄날

‘동행’과 ‘봄날’ 외에 우수상 수상작 10편과 예심을 통과한 작품을 엮은 단행본 『살아있다는 것이 봄날』(문학세계사·사진)도 이날 출간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따뜻한 거 한 잔’(박태칠 ‘커피 주문’), ‘잘 노는 친구 잘 베푸는 친구 다 좋지만/이제는 살아 있어 주는 사람이 최고구나’(이상훈 ‘절친’), ‘할배가 안경을 찾아서/여기저기 돌고 있는데/네 살 손녀가 찾아 주었다/할배 손에 있다고’(천봉근 ‘잃은 안경’)등 노년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김우현 작가가 수록작 100편 하나 하나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낸 나태주 시인은 “짐짓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한 작품이 많았다. 읽으시는 분들에게 지혜와 유쾌함을 충분히 선사할 만한 작품들”이라는 심사평을 남겼다.

노인 인구가 늘며 한국에서도 노년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실버 센류(정형시)’가 인기를 끌었다. 일본 실버센류 대회 우승작을 한국어로 번역한 단행본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은 지난 2월 출간 후 교보문고 시 부문 1위에 올랐다. ‘내 나이 92살, 연상이 취향인데 이젠 없네’ 등 재치 있는 시구가 독자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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