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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 날라리' MZ노동자 집단행동 골치…北 외화벌이 딜레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 노동자들이 지난해 4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 있는 대형 공사현장에서 골조공사를 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 노동자들이 지난해 4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 있는 대형 공사현장에서 골조공사를 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김정은 정권이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 각지에 파견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잇따르는 가운데 북한 당국이 이를 주도하는 장마당 세대, 즉 북한판 MZ세대 노동자 관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체제 보위·규율기관인 국가보위성을 내세워 해외 파견 노동자들을 집중 단속하고 있지만, 오랜 해외 생활로 외부정보를 접한 젊은 노동자들을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1일 "중국·아프리카 콩고 공화국에서 발생한 북한 노동자 집단행동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이들은 대부분 현재 20~40대인 장마당 세대"라며 "외화벌이를 하는 북한 입장에선 청년 노동자를 원하는 현지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곤혹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는 듯하다"고 전했다.

앞서 일본 산케이신문은 지난 1월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내 허룽(和龍)시의 의류 제조 및 수산물 가공공장에 파견한 북한 노동자들이 처음 폭동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또 2월에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의 한 의류공장 내 북한 노동자 10여명과 콩고 공화국 건설 현장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수십명이 귀국 연기를 이유로 집단행동을 벌였다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지난해 4월 20일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북한 노동자 숙소에서 포착된 TV의 모습. 화면에선 조선중앙TV의 로고와 북한군의 시원으로 삼는 조선인민혁명군(항일 빨치산)관련 이야기를 담은 '주체혁명의 첫 기슭에서'라는 소개편집물의 제목이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지난해 4월 20일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북한 노동자 숙소에서 포착된 TV의 모습. 화면에선 조선중앙TV의 로고와 북한군의 시원으로 삼는 조선인민혁명군(항일 빨치산)관련 이야기를 담은 '주체혁명의 첫 기슭에서'라는 소개편집물의 제목이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중국에서 시작된 북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대륙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번지는 모양새다. 이와 관련, 산케이는 "지난 1월 중국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 북한 당국이 정보를 통제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 등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10만여명 사이에서 집단행동에 관한 소문은 오히려 확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국정원도 "북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권리의식 신장이 집단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 관련 동향을 주시 중"이라는 입장이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극도로 경계하는 북한 주민들의 외부정보 접촉에 따른 영향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국경 봉쇄를 해제한 이후 해외 파견 노동자를 활용한 외화벌이를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이들에 대한 단속을 집중적으로 강화했다. 노동자들을 당국이 운영하는 숙소에 모아 놓고 출·퇴근 시키는 것은 물론 일과시간 이후 '김씨 일가'의 우상화를 다룬 영상물의 시청을 강요하는 정황이 확인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내에서 북한 식당 '고려관'을 운영하던 자리에 들어선 중국 식당의 모습. 식당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성업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지난해 5월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내에서 북한 식당 '고려관'을 운영하던 자리에 들어선 중국 식당의 모습. 식당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성업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김정은 정권이 노동자들의 사상이완을 우려하는 배경은 코로나19로 파견 기간이 길어지면서 잇따른 노동자들의 이탈 때문이었다. 2022년 11~12월 러시아 각지에 파견됐던 북한 노동자 9명이 집단으로 탈북해 국내에 입국했고, 지난해 3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관리하던 간부가 탈북을 시도하다가 발각돼 체포됐다.

이들은 결국 김정은 정권 입장에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김정은 정권의 통치자금을 조달하는 핵심 '돈줄'이지만, 외부 사조를 북한 사회 내부로 유입시키는 창구인 이른바 '반동 날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앞으로도 사상 통제 강화를 통해 해외 노동자를 관리하려 들 것으로 관측한다. 국제사회의 전방위 제재로 노동자 해외 파견을 대체할 수 있는 외화벌이 수단이 마땅치 않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에 저임금 노동자들이 필요한 러시아의 수요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이 지난 1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돕던 한국인 선교사 백모 씨를 간첩혐의로 체포하고,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국장이 지난달 평양을 방문한 것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북한의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실태를 연구하는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열악한 노동현장에 내몰린 젊은 북한 노동자들이 당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이라며 "이들은 스마트폰 등을 통해 외부정보를 접하는 빈도가 높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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