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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솔리다임에 1.3조원 대여? No” 반대표 던진 SK하이닉스 사외이사들

중앙일보

입력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27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열린 제76기 정기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27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열린 제76기 정기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SK하이닉스 이사회가 지난해 낸드부문 자회사 ‘솔리다임’에 운영자금을 대여해 주는 안건을 두고 팽팽하게 대립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24개월 연속 적자 행진 중인 솔리다임에 조 단위 자금 대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자 사외이사들이 나서서 ‘옐로 카드’를 던진 것이다.

1일 재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월 23일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날 안건은 솔리다임이 포함된 ‘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스’에 10억 달러(1조3500억원)의 자금을 대여해주는 내용이었다. 다른 의결·보고사항 없이 이 안건 때문에 모였지만, 이사들은 “자료가 부족하니 보완해서 보고하라”며 만장일치로 부결시켰다.

2주 후인 9월 5일 같은 안건으로 이사회가 다시 소집됐다. 앞서 부족하다고 지적받은 자료도 추가로 보고됐다. 이사들은 솔리다임에 운영자금이 꼭 필요한지, 어떻게 쓰일지, 경영 성적표는 어떤지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상당 시간의 토론 끝에 안건은 표결에 부쳐졌다. 해당 안건에 의결권 없는 사내이사 2명(박정호 부회장과 곽노정 사장)을 제외한 8명의 이사 중 6명이 찬성해 자금대여는 결국 승인됐다. 그러나 자금 대출의 효과와 SK하이닉스에 미칠 영향 등을 크게 우려하던 송호근(포항공대 석좌교수)·한애라(성대 법학전문대교수) 두 사외이사는 결국 반대표를 던졌다.

운영자금에만 8조...내년 2차 대금 지급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부 ‘솔리다임’ 본사 건물. 사진 솔리다임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부 ‘솔리다임’ 본사 건물. 사진 솔리다임

지난해에만 1월(1조1113억원), 5월(1조780억원), 9월(1조3475억원) 총 세 차례의 조 단위 자금이 본사에서 솔리다임으로 흘러갔다. 솔리다임은 SK하이닉스가 2021년 12월 인텔 낸드 사업부에 대한 1단계 인수를 마친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 설립한 낸드플래시 메모리 자회사다. 1차 인수대금 70억달러(약9조4000억원)는 2021년에 지급했고, 내년 3월에 잔금 20억달러(2조7000억원)를 마저 지불해야 한다.

솔리다임은 지난해 4조344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완전자본잠식(자본총계 -3조2688억원) 상태이고, 부채가 13조7140억원에 달하는데, 앞으로도 돈 들어갈 일이 더 남았다. 인수완료 후 세팅 작업과 공장 운영 비용 등 현금이 꾸준히 필요하다. 이제까지 SK하이닉스가 솔리다임 운영자금으로만 총 8조8053억원을 대여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대한 우려는 SK하이닉스 감사보고서에도 드러난다. 지난달 8일 SK하이닉스가 제출한 감사보고서에는 “지속적 실적 부진 등을 고려해 손상 징후가 있다”라며 핵심 감사사항 세 가지 중 하나로 솔리다임 자금 대여를 꼽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공인회계사는 “보고서에 이렇게 언급했다는 건 감사과정에서 기업에 상당한 자료를 요구하고 유심히 들여봤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낸드 시장 살아날까

엔비디아 GTC 2024에 전시된 SK하이닉스의 PCIe 5세대 ‘PCB01’ 기반 소비자용 SSD(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 SK하이닉스

엔비디아 GTC 2024에 전시된 SK하이닉스의 PCIe 5세대 ‘PCB01’ 기반 소비자용 SSD(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로서 다행은 낸드 시장의 업황이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3분기 1조4302억원이던 솔리다임의 영업손실액 규모는 4분기 3619억으로 75%가량 줄었다. 4분기 매출액(9253억원)은 전 분기 대비 14% 늘었다. 수요가 저조한 제품을 적극 감산해 운용비를 절감하고 재고를 최적화는 방식으로 적자를 줄여 나갔다. 낸드 가격도 상승세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낸드 평균판매단가(ASP)가 올해 1분기에 전 분기 대비 23∼28% 오른 데 이어 2분기에는 13∼18%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는 올해 수익성 중심으로 낸드 전략을 전환한다는 방침이다. 곽노정 사장은 지난달 27일 주주총회에서 “최근 빅테크 기업 중심으로 솔리다임의 eSSD(기업용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구매가 큰 폭으로 증가해 실적 개선이 예상된다”며 “솔리다임의 고용량 스토리지 제품 경쟁력과 SK하이닉스의 낸드·시스템온칩(SoC) 기반 제품 개발과 결합해 시너지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 낸드 분야 전문가인 안현 SK하이닉스 솔루션개발담당(부사장)을 새로운 사내인사로 선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이 살아나도 고민은 계속될 거라는 견해도 있다. D램과 달리 낸드 시장은 주요 5개 업체가 비슷한 규모로 점유율을 나눠 갖는 특성 탓에 한 업체가 지배력을 갖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시장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낸드 자체가 부가가치가 크지 않고 산업적으로 임팩트를 주기 쉽지 않다”라며 “(미국의 대중국 기술 제재로 인해) 솔리다임 중국 다롄 공장 내 장비 반입 문제도 갈등의 불씨로 남아있는 것도 회사에 부담이 되는 요소”라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거수기 비판받던 韓기업 이사회, 이례적 반대표

국내 대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소신 있게 반대표를 던지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 지난해 삼성전자 이사회에 올라온 31개 안건은 100% 찬성으로 가결됐다. LG전자와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SK그룹의 다른 주요계열사인 SK텔레콤과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이사회에서도 반대표는 없었다. 지난해 4대 그룹 주요 계열사 이사회 중 반대표가 나온 건 SK하이닉스가 유일했다.

SK하이닉스 이사회는 이전에도 이사들의 반대로 부결됐거나, 이사들 간 찬반이 갈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21년엔 2개 안건이 이사 전원 반대로 부결됐고, 2020년에는 송호근 이사가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SK는 과거 헤지펀드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을 받은 이후 이사회의 감시와 견제 활동이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지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주요 안건은 이사회에 올리기 전 이사들에 설명·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인데, 그럼에도 사외이사들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건 사외이사들이 확고한 반대 이유를 남기려는 의미가 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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