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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거부에 유엔 전문가 패널 종료…대북제재 'CCTV' 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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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28일(현지시간)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오는 4월 30일까지)를 종료하기로 한 것은 수십년 간 유지돼 온 대북 제재 역사상 가장 큰 퇴보로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핵능력 고도화에 여념이 없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큰 선물을 안긴 것은 물론이고, 대북 제재를 우회해 북한을 지원해온 국가들이 더 대담하게 제재를 무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왼쪽 세번째)가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황준국 주유엔대사(왼쪽 두번째) 등 총 10개국 대표와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왼쪽 세번째)가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황준국 주유엔대사(왼쪽 두번째) 등 총 10개국 대표와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 패널은 대북 제재 분야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집단으로, 제재 위반 혐의를 추적하고 조사하는 데 특화됐다. 국제적으로 가장 포괄적이고 방대한 정보를 안보리에 보고하고, 일반에도 공개한다. 이를 통해 제재 준수를 독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전문가 패널은 15년 전인 2009년 만들어졌다. 이후 꾸준히 대북제재 위반 행위를 감시해왔기 때문에 다년간 축적한 정보를 토대로 장기 조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를 통해 조사의 연속성과 신뢰성 또한 확보할 수 있었는데, 하나의 위반 혐의를 몇 년에 걸쳐 조사하거나 연결되는 다른 혐의로 조사를 확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매해 두 차례 발간되는 보고서에 제재 위반의 소지가 있는 국가로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등 직·간접적으로 제재 준수를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다.

러시아가 전문가 패널 임기를 끝낸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과 제재 위반에 해당하는 불법적 무기 거래를 계속 해야 하는 러시아로서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없앨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실제 러시아는 지난해 8월에도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 용병 바그너그룹이 말리 군부와 함께 인권 침해를 한다는 보고가 나오자 2017년부터 지속되던 말리에 대한 제재 갱신을 거부했다. 불법 침략 전쟁 수행의 걸림돌을 치우기 위해 상임이사국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북 제재를 위반한다는 의혹을 가장 많이 받아온 중국과 러시아조차도 그간 전문가 패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 패널이 위반 혐의를 제기할 때마다 답변서를 보내 제재를 준수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불법 석탄 거래가 의심되는 위장 북한 선박의 자국 항구 정박에 대해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식량을 적재하려던 것”으로 해명하는 식이었다.

적어도 제재 체제를 존중하는 틀 내에서 빈틈도 노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폐쇄회로(CC)TV가 사라진 우범지대에서 보다 과감하고 손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0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지도하에 전날인 19일 신형 중장거리 극초음속 미사일용 고체연료 발동기(엔진) 지상분출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0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지도하에 전날인 19일 신형 중장거리 극초음속 미사일용 고체연료 발동기(엔진) 지상분출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뉴스1

다만 방법론적 측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제재 체제 자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한·미·일 등이 임기 연장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이날 투표에 동의한 것도 러시아의 막무가내 주장으로부터 제재 체제를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러시아는 패널이 매해 또다른 결의 채택을 통해 임기를 연장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대북 제재에도 매해 적시성을 검토하는 일몰조항을 넣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북 제재도 매해 새로운 결의 채택을 통해 갱신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러시아와 중국이 새 결의에 찬성할 가능성은 매우 작기 때문에 사실상 1년 뒤에는 유엔의 모든 대북 제재를 없애자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재를 잃을지, 패널을 잃을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물론 패널이 사라져도 제재위는 유지된다. 제재 위반 혐의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게 본래 제재위의 설립 목적이고 전문가 패널은 이를 원활하게 수월하기 위해 일부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해 왔다. 패널이 없어진 만큼 이제 제재위 차원에서 직접 해당 기능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스테판 뒤자리크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도 투표 부결 뒤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대북제재위는 지속되며 제재 체제 이행을 감시하는 역할을 여전히 수행할 것”이라며 “안보리 이사국과 대북제재위 구성원 국가들은 대북제재를 포함한 모든 안보리 제재를 지속해 알리기 위해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8일(현지시간) 오전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기 위한 결의안 표결을 진행하는 모습. 유엔웹TV 캡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8일(현지시간) 오전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기 위한 결의안 표결을 진행하는 모습. 유엔웹TV 캡처

정부는 한·미·일과 호주, 유럽연합(EU) 등 뜻을 함께 하는 동맹·우호국들이 연합해 독자 제재와 제재의 이행 감시를 강화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러시아의 거부권으로 마비된 안보리 기능 일부를 연합 제재망을 통해 메우는 전략이다.

다만 미·러 및 미·중 간 대결 격화로 전세계가 진영화하는 추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러가 객관성과 신뢰성 등을 꼬투리잡을 우려가 크다. 오준 전 주유엔 대사는 “전문가 패널이 없어져도 안보리 제재 자체는 계속 될텐데, 다만 객관적 보고서에 기반한 토론보다는 이사국들이 제기하는 위반 증거를 중심으로 다루게 되어 더 논쟁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며 “아직 임기 종료가 한 달 정도 남은 만큼 전문가 패널을 살리기 위한 안보리 내의 협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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