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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말라" 울며 붙잡은 환자…빅5병원 교수는 사직서 접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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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후배들한테 부끄러운 의사란 소리를 들어도 환자를 떠날 순 없어요.”

빅5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A교수의 이야기다. 27일 가톨릭대 의대까지 빅5 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둔 의대가 전부 사직을 결의한 상태다. A교수는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A 교수는 26일 통화에서 “제가 치료한 환자가 울면서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 한두 명씩 사라지니 버림받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며 “그런(사직) 마음이 생길 수 없다”고 했다. 또 “환자들에게 ‘난 (사직서를) 안 낼 것이다. 다 나가고 한 명 출근하면 그게 나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라고도 했다.

사직서를 내지 않는 건 정부 정책 방향에 일부 동의하는 마음이 있어서라고도 했다. A 교수는 어느 순간 의사 수가 부족할 것이고 의사 증원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다만 2000명이 적당한지에 대해선 “정확한 규모는 내가 잘 몰라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A 교수는 정부가 의사 증원과 함께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필수 의료 패키지에 대해서도 “비급여 혼합 진료 금지를 빼면 형사처벌 특례, 수가 보전 등 필수과 의사들이 주장한 것이 담겨 있다”라고 했다.

25일 오전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열린 ‘고려대학교 의료원 교수 총회’에서 교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오전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열린 ‘고려대학교 의료원 교수 총회’에서 교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A 교수는 지난달 전공의들이 먼저 병원을 떠날 때도 “면허는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EMR·전자의무기록시스템) 로그인이라도 한 번 하고 증거를 남겨 달라고 했지만 한 명도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제자들을 나중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다”라고도 털어놨다.

빅5 병원 B 교수도 사직서를 내지 않을 생각이다. B 교수는 “환자한테는 5년 후, 10년 후에 와도 이 의사가 병원에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며 “어린 환자가 군대 갈 때, 취직할 때까지 내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데 내가 지금 그만두면 아이를 잘 아는 의사가 병원에 남아있지 않는 게 된다”라고 했다. 그는 “1년 연수를 가더라도 훨씬 전부터 대책을 세워두고 가는데 지금 사직하면 대책 없이 그만두는 것”이라고 했다.

앞서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1400명 교수 가운데 사직서를 낼 이들이 400여명 정도라고 했다. 울산대 의대는 767명 교수 중 433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연세대 의대는 정확한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빅 5 병원 관계자는 “거꾸로 보면 많게는 절반 정도가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는 건데 분위기 때문에 이런 의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서울 한 대학병원 C 교수는 “당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있어 동참하지 않고 있다”면서도 “수술을 하려 해도 마취과 등 타과 도움이 필요한데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간다면 혼자 계속 뜻을 지키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사직서는 입장을 표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라며 “정말 환자를 놔두고 가겠다는 생각을 한 교수들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빅5 병원 D 교수는 “사직서 제출은 사태 해결을 압박하는 메시지,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며 “동참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A 교수는 “사직서는 전산으로 내면 된다. 모여서 쓸 일도 아니고 투표함 같은 것도 필요 없다. 한 번에 걷어서 내는 건 퍼포먼스, 쇼 아니냐”고 했다. 그는 “주변 교수님들 눈치 봐서 내는 분도 있는 것으로 안다. ‘너 냈니’ ‘네, 형님 저도 냈어요” 진심이 아닌데 선·후배 눈치를 봐서 사직서를 내는 쇼는 거부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교수들은 일관되게 사직서를 내도 중증·응급환자 치료는 놓지 않겠다고 해왔다. 그러나 환자들은 낯섦과 두려움을 호소한다. 의대 교수의 사직서 제출이 시작된 지난 25일 고려대 의대 교수들이 한 데 모여 수거함에 사직서를 넣는 모습이 보도되자 의사 커뮤니티에선 “행동하는 지성에 박수를 보낸다” “쇼라도 좋다” 등 지지 반응이 나왔다.

한 환자 보호자는 “아이 진료가 예정돼 있는데 웬 날벼락이냐”며 “다른 병원으로 도미노처럼 번질까 두렵다”고 했다. 다른 보호자는 “단체로 줄줄이 투표하듯 뭐 하는 것인지”라면서 “교수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했다.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등 7개 단체로 구성된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27일 낸 자료에서 “‘번 아웃’ 문제가 안타깝지만, 생명이 걸린 입장에서 의사를 이해해 달라는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며 “필수 의료 담당 교수가 단 한 명이라도 실제 병원을 나가면 환자 죽음을 방조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19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 1층 로비에 ″의사 선생님 환자 곁을 지켜주세요″라는 소원쪽지가 붙어 있다. 뉴시스

지난 19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 1층 로비에 ″의사 선생님 환자 곁을 지켜주세요″라는 소원쪽지가 붙어 있다. 뉴시스

공개적으로 교수들의 단체 행동에 다른 목소리를 낸 이도 있다. 이미정 충남 천안 단국대병원 소아청소년과장은 지난 22일 ‘청년의사’에 “사직의 도리를 다하고 사직을 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기고를 했다. 이 교수는 “한 달 있다가 정말 병원, 학교를 떠나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대부분은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해결 못 한 환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아픈 환자를 버려두고 병원을 나서는 순간, 국민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지는 것”이라며 “더 나쁜 건 우리 스스로에게도 지게 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공의들이 중환자와 응급환자를 맡기고 갔는데 이들이 부재한 상태에서 교수들마저 떠나면 “정말 의료대란이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사가 파업할 경우 응급의료와 암 수술 등 필수 의료는 중단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의사 파업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라고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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