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승욱의 시시각각

이재명은 왜 겁을 먹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선거 때마다 야당이 이겼던 서울 강북을 공천이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될지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천 과정에서 찬 수많은 '✕볼'의 하이라이트였다. 최종 낙점된 한민수 후보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박용진을 죽이기 위해 픽업된 앞선 두 사람에 비하면 훨씬 낫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지켜본 그 과정이 너무 지저분했다. 자객 공천, 경선 방식의 급변침, 기상천외한 '신공'들이 등장했다. "시스템 망천(亡薦)의 결정판" "꼼수 공천의 끝판왕"이란 욕을 먹어도 싸다.

지난 대선 때부터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큰 흐름은 '윤석열 대 이재명', 비호감 정치인 둘의 적대적 공생이다. 그중에서도 이 대표를 상대로 맞은 윤 대통령의 '야당 복(福)'이 먼저 주목을 받았다. '사법리스크 백화점'인 이 대표에 대한 비호감으로 중도층 국민들은 아무리 윤 대통령이 싫어도 도망칠 공간이 별로 없었다. 국민의힘보다 낮은 민주당 지지율이 그 증거다. 하지만 거꾸로 이 대표가 누리는 행운도 범상치 않다. 숱한 약점에다 아무리 헛발질해도 인기 없는 정권 덕분에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자넌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함께 참석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자넌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함께 참석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역대 보수 진영 대통령들의 집권 2년 차 3, 4분기 직무수행 긍정 평가 비율에서 윤 대통령은 최하위권이다. 한국갤럽 집계에서 이명박(3분기 36%, 4분기 47%), 박근혜 44%(3, 4분기)였는데 윤 대통령은 2년 차 3분기 평균이 33%다. 야당인 민주당엔 싸우기 만만한 상대다. 특히 이 정권은 고집스럽게 민심을 거스르다 자멸하기 일쑤다. 국민들을 화나게 하는 독특한 능력을 지녔다. 공감 능력 결여의 대표적 사례가 총선 정국을 흔든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를 호주로 보냈는지 여당까지도 불만인데, 대통령실은 '국방과 방산 협력이 중요하다'는 답이 전부였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잘라내야 했던 여사 명품백이나 '회칼 황상무' 이슈도 질질 끌며 화를 키웠다. 대국민 소통도 빵점이다. 대통령은 신년회견 대신 특정 언론사와 대담이나 인터뷰를 했다. 입맛에 맞는 언론에서, 뻔한 질문만 받고 싶은 욕심이 다른 대통령들은 없었을까. 이전 정권에선 국민이 두려워 감히 꿈도 못 꾼 일을 이번 대통령실은 태연하게 실천한다.

용산과 한동훈 독주와 실책에도
대권 불안감에 결국 속 좁은 공천
정치적 도약 기회 스스로 걷어 차

책으로, 머리로 정치를 익힌 탓일까.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공감 능력도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들은 경제·물가 때문에 못 살겠다는데 '종북 극단주의 세력' '이재명, 감옥' '운동권 심판' 같은 관념적 얘기만 입에 달고 살았다. 안 그래도 '검찰 정권'과 '검찰·경찰당'에 반감이 큰 중도층 국민들을 더 멀리 밀어낸다. 대통령과의 잦은 충돌과 감정 소모, 후보들보다 본인 홍보에 진심인 듯한 모습에 "총선이 아니라 대선을 뛰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지만, 심지어 여당 일부 당직자들도 사석에선 불만을 쏟아낸다.

열등생들의 경쟁에선 조금만 노력해도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은 이 대표에게 빅 찬스였다. '비명'들을 횡사의 절벽으로 내몰지 않고 가슴으로 품었다면 국민들은 의외의 대인 풍모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여권의 리더십과 대비되면서 정권심판론의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커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고, 이 대표는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찼다. 임종석과 박용진을 줄줄이 내친 건 대선 가도의 변수들을 빨리 제거하겠다는 조급증과 새가슴 탓일 것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든다지만, 이보다 훨씬 견고했던 과거 '이회창의 한나라당'도 대선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대표의 정치적 그릇은 지난해 9월 그 굴욕적인 체포동의안 부결 호소 때보다 조금도 커진 게 없다. 용기없는 자가 세상을 거머쥔 적이 있었나. 이재명의 정치적 꿈이 결국 실패한다면 '비명횡사'로 얼룩진 이번 공천이 그에겐 천추의 한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