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의 손을 떠난 국민의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22대 총선을 19일 남겨놓고 국민의힘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수도권 요충지의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에 밀리는 결과가 대부분이다. 이대로 가면 103석에 그쳤던 21대 총선 수준의 참패를 당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 탄핵까지 시사하고 나섰다.

몇 주 전만 해도 1당을 바라본다던 국민의힘이 순식간에 미끄러진 건 윤 대통령이 선거의 한복판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의 ‘해외 도피’ 논란과 황상무 전 시민사회수석의 ‘기자 테러’ 발언이 연이어 터지면서 윤 대통령이 선거 이슈를 장악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해외 도피' 논란을 일으킨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해외 도피' 논란을 일으킨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사실 국민의힘은 지난 연말 한동훈 비대위원장 체제가 되면서 선거 이슈에서 윤 대통령을 지우기 위해 무지하게 애썼다. 민주당이 정권심판론을 들고 나올 게 뻔한데,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불과한 상황에서 정권심판론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래서 국민의힘은 ‘윤석열 vs 이재명’의 프레임을 ‘한동훈 vs 이재명’의 프레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참패 위기 속에 황당한 윤·한 충돌
대통령은 정치판 속성 인정해야
여당을 점유물로 착각하면 안돼

이런 전략은 한때 먹히는 듯싶었다. 특히 지난 1월 김경율 비대위원 문제로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 축출에 나섰던 것도 결과적으론 국민의힘에 나쁘지 않았다. 누구는 약속대련이라고 비꼬았지만, 사실은 진짜로 두 사람이 충돌했다. 당시 한 위원장은 자신이 윤 대통령의 아바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했고, 이는 국민의힘의 프레임 전환에 도움이 됐다. 이후 민주당에서 ‘비명횡사’ 공천 파동이 벌어지면서 국민의힘은 순항하는 듯했지만, 이종섭·황상무 논란으로 공든 탑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문제 자체보다 그로 인해 선거 프레임이 원상 복구됐다는 점이 국민의힘엔 뼈아프다.

국민의힘에서 친윤계 핵심인 이철규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에서 친윤계 핵심인 이철규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이해가 안 가는 건 윤 대통령의 속내다. 지금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권의 명운이 걸린 총선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불법만 아니라면 여당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줘도 시원찮을 판이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이종섭·황상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그토록 요청해도 한동안 뜸을 들인 건 뭣 때문이었을까. 윤 대통령은 자신과 국민의힘이 운명공동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알지만 당에 밀리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겠다는 오기였을까. 결국 이 대사는 귀국했고, 황 전 수석은 사퇴했지만 대통령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미 두들겨 맞을 것은 다 맞아버렸다.

긴급 봉합되긴 했지만 20일 벌어진 비례대표 충돌도 황당하다. 친윤계 핵심인 이철규 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비례대표 사천(私薦) 논란을 제기하며 한 위원장을 들이받았다. 이 의원의 발언은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했다는 게 정설이다. 윤 대통령이 요청한 인사가 비례대표 당선권에서 밀려나 대통령이 화가 났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대통령 측이 여당 지도부를 공개 저격하다니.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을 자신의 점유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큰 착각이다. 대통령이 득표에 보탬이 된다면 절대 충성을 맹세하지만, 대통령이 선거에 부담이 된다면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정치판의 속성이다.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던 이용 의원과 김은혜 전 홍보수석도 선거 현장에서 싸늘한 민심을 확인하니 곧바로 ‘이종섭 귀국, 황상무 사퇴’를 외치지 않던가.

2012년 총선 때 이명박(MB)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쳤지만 여당이 예상을 깨고 승리한 것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내세워 프레임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MB는 선거기간 내내 철저히 로키를 유지했다. 공천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자녀가 중2만 돼도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 이치다. 윤 대통령도 국민의힘에 대해 마음을 비우는 게 바람직하다. 국민의힘은 이미 윤 대통령의 손을 떠났다. 총선 이후엔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