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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토리노의 말을 보고 니체는 왜 미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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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현실과 해석은 분리될 수 있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말에게 달려간다. 말의 목을 감싸 안고 날아오는 채찍질을 막으려 든다. 바로 이 순간 니체는 미쳐버린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그 광기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다. 니체는 왜 미쳐버린 것일까.

채찍질당하는 말을 감싼 니체

작고하기 얼마 전, 베스트셀러 작가 이어령은 토리노의 말 사건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간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토리노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예수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인간의 편에 서지 말고 동물의 편에 서라는 신의 부르심이었다고 이어령은 해석한 것이다. 때리는 인간을 거절하라. 때리는 인간을 벗어나라. 그 결과, 니체는 초인 아니 광인이 되었다.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고
현실은 늘 해석된 현실일 뿐
급변하는 세계의 신·동물·사물
기존 해석이 유지될 수 있는가

헝가리 영화 ‘토리노의 말’.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마부로부터 채찍질을 당하고 있던 말을 붙잡고 울었던 일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니체가 아니라 그 일화에 등장한 말과 마부 그리고 마부의 딸의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상 캡처]

헝가리 영화 ‘토리노의 말’.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마부로부터 채찍질을 당하고 있던 말을 붙잡고 울었던 일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니체가 아니라 그 일화에 등장한 말과 마부 그리고 마부의 딸의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상 캡처]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사건의 존재는 결코 실증된 적이 없다. 토리노 말 사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추정된 발발 시기보다 11년이 지나서야 등장하며, 그 기록조차 전해지는 풍문을 받아적은 것에 불과하다. 과연 그때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있었는지, 니체가 그 말을 보았는지조차 확증할 수 없다. 토리노의 말 사건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이야기다. 해석을 부르는 강력한 이야기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회자되고 거듭 재해석되었다. 이를테면,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의 행동을 데카르트적 철학의 거부로 해석한다. 쿤데라가 이해하는 데카르트는 인간과 동물을 명백히 구분한 철학자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자 동물을 소유하는 존재인 반면, 동물은 움직이는 기계(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 인간은 기계를 부리듯 동물을 부릴 권리가 있으며, 동물의 고통에 찬 신음은 고장 난 기계가 삐걱대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니체의 행동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많은 이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특히 니체가 살던 시대에서는 더욱더. 마부는 말을 자기가 소유한 물건이라고 보기에 자기 맘대로 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꼭 데카르트 철학 전통이 있는 유럽에서만 일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동물을 물건 다루듯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은 개를 음식의 일종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개는 단백질 덩어리요, 말은 숨 쉬는 물건일 것이다.

쿤데라의 데카르트 해석이 학문적으로 타당한지 여부는 차치하자. 어쨌거나 쿤데라에 따르면,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을 껴안고 울부짖은 행동은 동물을 물건 취급해 온 (데카르트 같은) 인간들을 용서해달라는 애원이었다는 거다. 쿤데라는 그것을 “인류와의 결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에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주인공은 애인 테레사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니체는 바로 그런 니체다.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하는 테레사는 그런 테레사다. 무릎에 죽어가는 개의 머리를 얹고 쓰다듬는 사람이다. 나는 니체와 테레사가 나란히 선 모습을 그려본다. 이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주’가 행진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주인공이 보기에, 니체나 테레사는 어설픈 이성(理性)의 신봉자가 아니다. 그들은 공감의 신봉자다. 이들은 인간이 아닌 대상에까지 자신의 공감 영역을 넓혔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도덕적인 존재다.

동물 학대에도 해석이 작용한다

니체가 존경한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비루한 인간을 넘어선 진정한 영웅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비범한 영웅은 비루한 인간을 죽이는 일마저 감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주변에서 가장 비루해 보이는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죽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던 그는 밤에 악몽을 꾸게 된다. 사람들이 가득 찬 수레를 끄느라 신음하는 여윈 말을 껴안고 키스하는 꿈을. 도대체 이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살인을 앞둔 주인공의 무의식을 반영한 걸까. 괴로워하는 말은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 자기 손에 죽게 될 노파? 혹은 노파를 죽일 자신?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인간 일반? 그것도 아니면 인간에 의해 혹사당하는 동물 일반? 확실한 것은 보통 인간과 달라지겠다고 마음먹은 이의 꿈이라는 것이다.

취객이 자기가 탄 마차의 마부를 때리고 마부는 화풀이로 다시 말을 때리는 장면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고 하니, 도스토옙스키는 현실과 무관한 묘사를 한 것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동시대 시인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역시 얻어맞는 말을 묘사한 시를 남긴 것을 보면, 동물 학대는 당시 러시아 혹은 유럽 전체의 현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을 때리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인간이 그렇게 말을 때릴 수 있는 데는 이미 말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개재되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현실 그 자체를 묘사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만, 파악된 현실에는 이미 자신의 관점이 깃들어 있다. 식육자는 동물을 음식으로 보는 관점을 갖고 있고, 채식주의자는 그런 관점을 거부한다. 식육자들은 채식주의자에게 반문한다. 식물 역시 생물인데 왜 그것들은 먹어도 된단 말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 식물을 넘어 물건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본 사람들도 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음식을 베어 물 때마다 음식에 상처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니체처럼 음식을 껴안고 미쳐버리지 않을까.

광인은 ‘해석의 코드’ 거부하는 자들

조선 시대에 개고기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였다. 소의 식용 도축은 불법이었고, 돼지고기는 오늘날처럼 보편화하지 않았다. 대개 닭이나 개를 먹었다. 그러던 한반도에 조선의 니체가 있어, 어느 날 아버지가 보신탕을 먹는 현장에 난입하여 울부짖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를 개 먹는 문화에 반기를 든 문화적 영웅이라고 간주해야 할까. 아마도 그는 광인 취급을 받았으리라. 난동을 부릴 때, 그는 공감이 넘치는 상태라기보다는, 개고기란 대상을 해석할 코드를 잃은 상태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가 개고기가 음식이라는 당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 이전의 개고기 현실과 마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붉은 살점, 이게 도대체 뭐지… 하다가 미쳐버린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해석하지 않고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주제 파악을 하라, 현실 파악을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 누구도 해석 이전의 주제 파악이나 현실 파악을 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석 이전의 현실이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그런 걸 보고서 미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니콜라스 뢰그 감독의 영화 ‘보지 마라’에서 베니스에 여행 온 부부는 오래전 익사한 어린 딸의 뒷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뒷모습을 좇아 미로와 같은 베네치아의 골목골목을 헤맨다. 마침내 저 멀리서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지만, 아무리 다가가도 그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간신히 아이를 붙잡아 그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가 목격한 것은 자기보다 늙어버린 딸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 아이는 잃어버린 현실의 비유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파악된 주제나 현실이 결코 유쾌하리란 법은 없다.

어떤 해석도 영원하지 않다

해석 이전의 현실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끔찍하여 감당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해석 없이 살 수 없다. 신, 동물, 사물에 대한 일정한 해석을 전제하지 않고는 문명을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결국 기존의 해석이 오작동하는 순간이 온다. 토리노의 말 사건의 핵심은 단순히 연민과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연민과 공감이 만능은 아니다. 일정한 해석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공감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미역국을 먹으며 미역에 상처가 될까 봐 목이 메면 어쩔 것인가. 많은 이들이 불쌍한 말을 감당할 문화적 코드를 향유하던 시절에 니체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코드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벌거벗은 현실을 마주하고 결국 미쳐버린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해가는 오늘날, 기존의 신, 동물, 사물에 대한 기존 해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결국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왜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느냐고 개탄하기 이전에, 자기 현실이 결국 현실에 대한 해석임을 인정하는 일, 자기 해석이 유일한 해석이 아님을 인정하는 일, 특정 해석이 시대와 맺는 관계를 질문하는 일, 어떤 해석도 영원하지 않음을 감내하는 일, 해석을 강제당하기 전에 해석을 스스로 구성해보는 일, 그러한 노력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좀 덜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