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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의대 증원 ‘2000명’, 이 혼란 감내할 만큼 금과옥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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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 참고한 보고서에도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

더 중요한 필수·지방의료 대책, 숫자 논란에 묻혀

대통령 대화협의체 지시, 증원 규모도 논의하길 

전공의 파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12일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전공의 파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12일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의료 현장을 이탈한 의사들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을 유연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의료인과 협의체를 구성해 대화를 추진하라는 당부도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날 오후 의대 교수 대표들을 만난 직후 나온 언급이다. 당초 오늘부터 면허정지 처분에 나서고 의사들은 사직서를 내기로 하면서 예상됐던 파국을 피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2000명은 필수불가결했나

정부의 의사 부족 주장 근거

정부의 의사 부족 주장 근거

그동안 정부와 의사 간 ‘강 대 강’ 충돌의 핵심은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이다. 정부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2.6명), 10만 명당 의대 졸업자 수(7.3명)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7명, 14명)보다 월등히 적다며 대폭 확대를 주장한다. 필수·지역의료 붕괴를 막을 대책도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봤다. 소아과 오픈런, 문 닫는 지방의 산부인과, 석 달 기다려 3분 진료받는 현실을 지켜본 국민도 찬성 입장이 많았다. 의사들도 증원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전국 의사 수급 추계 시나리오

전국 의사 수급 추계 시나리오

문제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2000명이란 증원 규모가 불쑥 제시되면서 불거졌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6일 “2035년 의사가 1만5000명 부족할 전망인데 2025학년도부터 2000명이 추가 입학하면 2031년부터 5년간 최대 1만 명이 확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전망의 근거는 서울대 홍윤철 교수, 한국개발연구원(KDI) 권정현 박사, 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명예연구위원의 연구보고서였다. 현재 의대 정원이 유지될 경우 2035년 무렵엔 의사가 1만여 명 부족할 가능성을 예측한 것은 공통적이다. 다만 세 연구는 여러 변수를 넣어보며 짧게는 2035년, 길게는 2050년 이후까지 의사 부족과 과잉 여부를 시뮬레이션했다. 증원 규모를 비롯해 고령화 추세, 의료기술 발전 등 변수는 다양하다. 그때마다 의사 수급 상황은 급변한다. 2040년 이후 공급 과잉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세 저자 모두 최근 토론회에서 2000명 증원 안에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이유다. 그래서 이 중 KDI 보고서는 “매년 5~7%씩 점진적으로 늘리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명시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몇 명이 필요할지 의견을 들을 수는 있지만 결정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간 의사들이 집단행동으로 증원을 무산시켜온 전력을 고려한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선택지는 다양하다는 게 보고서 메시지다. 2000명이란 숫자가 이 모든 혼란·희생을 감수하며 지켜야 할 금과옥조는 아니라는 의미다.

점진적, 단계적 증원으로 성공한 해외 사례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에서 열린 의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의대 증원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뉴스1]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에서 열린 의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의대 증원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뉴스1]

다른 나라들도 의대 정원을 늘려 왔다. 그러나 한꺼번에 66%씩 급격히 증원한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 일본은 2007년 7625명인 정원을 올해 9403명으로 17년간 1778명(23.3%) 늘렸다. 영국은 2023년부터 8년간 58%, 미국은 12년간 39%가량 늘렸다. 모두 점진적, 단계적 방식을 채택했다. 특히 일본 사례는 인상적이다. 지자체별 의사 수와 환자 상황 등 5개 지표로 지역편중지표를 만들고 상설기구인 의사수급분과회에서 검토해 반영했다.

지역에 안착시킬 세밀한 방책 필요

의대별 정원 정부 발표

의대별 정원 정부 발표

정부는 늘어난 정원 2000명의 82%를 지방에 배분했다. 증원의 출발이 지역의료 붕괴를 막자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다. 그런데 각 대학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충북대 최중국 의대 교수회장은 “정원 49명을 기준으로 연간 시신 10구를 기증받았는데, 200명이 되면 어떻게 교육을 진행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교수진 확보는 지금도 쉽지 않다. 수련병원 상황도 심각하다. 증원 전에도 지역 의대 정원은 수도권의 2배 정도였다. 하지만 병원에 배정된 수련의 정원은 수도권이 더 많다. 결국 지난 10년간 비수도권 의대 졸업생 1만9400여 명 중 47%가 수도권으로 와서 수련을 받았다.

지역거점병원과 공공병원, 중형 종합병원 간 권역별 네트워크를 만들고 충분한 검증부터 해야 했다. 또 지역 의무근무 입학 전형을 도입하고 어길 시 자격에 벌칙을 주는 등 늘어난 정원을 지역에 남게 할 대비책도 필요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역 의대를 나온 의사들이 지방에 남을 가능성이 2배 이상 높다는 연구에 기대 낙수효과만 바라는 형국이다.

필수의료 대책이 먼저다

의료계의 의사 부족 반박 근거

의료계의 의사 부족 반박 근거

OECD 통계에 따르면 치료가능 사망률(치료하면 살릴 수 있었지만 숨진 사람 비율)은 한국이 10만 명당 43명으로 OECD 평균(81.8명)의 절반 정도다. 도농 간 의사 밀도 차이도 우리가 적고, 1인당 연간 진료 건수는 우리가 두 배 이상 많다(한국 15.7회, OECD 평균 5.9회). 우리 의료 수준이 그만큼 양질이라는 의미다. 의사들은 이를 근거로 의사 수가 적은 게 아니라 구조와 제도의 왜곡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필수의료 인력 상황은 심각하다. 2022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충원율이 28%에 그치는 등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는 계속 미달이다. 무엇보다 위험·난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상체계가 근본 이유다. 일례로 협심증 수술의 국내 수가(건보공단이 책정한 가격)는 1035만원으로 미국의 10분의 1이다. 전체 진료 수가는 원가의 91%, 수술은 82% 수준이다. 병원은 수술을 할수록 손해를 보니 의사를 많이 뽑지 않는다. 대신 MRI 등 각종 검사를 반복해 돈을 번다. 병원을 지키는 전공의 업무량은 갈수록 늘어나는 악순환 구조가 됐다.

한국과 외국의 필수 의료 수가 비교

한국과 외국의 필수 의료 수가 비교

이를 바로잡으려면 원가를 100% 보장해 줘야 한다. 필수의료 분야는 두 배, 세 배로 늘려서라도 의료 인력을 붙잡아야 한다. 또 의료전달체계 개선, 전공의 의존도 축소와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 원가를 보전해 주려면 당연히 많은 돈이 들어간다. 건강보험료가 오를 수 있다고 정부가 솔직히 고백하고 ‘고통 분담’을 설득해야 한다.

어제 윤 대통령이 유연한 대처와 대화협의체 구성을 주문함으로써 꼬일 대로 꼬인 현 상황을 헤쳐 나갈 돌파구가 마련된 셈이다. 정부와 의사들은 서로 존중하며 모든 문제를 조건 없이 대화해야 한다. 의제에 의대 증원 규모를 유연하게 논의하는 문제가 포함돼야 함은 물론이겠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규모를 정하는 데 근거 삼은 세 편의 보고서는 2020~23년 발표됐다. 홍윤철 서울대 교수 보고서의 경우 모든 조건이 지금과 같다면 의사 수가 2030년 1만 명가량 부족해 정부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정원을 1500명 확대하면 의사 부족 규모는 3000명 이하로 유지되다 2043년 이후 급격히 공급 과잉 상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2000명은 분석 대상도 아니다.

KDI 권정현 박사팀 연구는 2021년에 정원을 한꺼번에 1000명 늘리는 것과 5%, 10%씩 10년간 늘리는 방안을 검토했다. 5%씩 늘릴 경우(2030년 정원 4518명) 2040년엔 균형, 2050년엔 1만 명 초과한다는 결론이다. 10%씩 확대하면 2040년부터 공급 초과 상태가 되고, 2050년엔 2만6000명이나 남는다고 한다.

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명예연구위원은 4가지 분석 방법을 적용해 무려 60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했다. 결과는 2035년 기준 8만 명 공급 부족부터 3만 명 과잉까지 다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