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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은 보고서도 안 보는데…"韓기업 인맥·사내정치 질렸다" [반도체 인재 쟁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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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1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 코리아2024'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 코리아2024'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 세계를 강타한 AI와 반도체 대전이 국경을 넘는 인재 쟁탈전으로 확전되고 있다. AI는 급격한 수요 폭발로 인력 절대량이 부족하고, 반도체는 한국·일본·대만·미국 등이 인재 사냥에 나섰다. 인재 수급은 물론, 있는 인재 지키기도 힘든 상황이다. 한국 기업이 첨단 인재의 연봉·처우 뿐 아니라 이들을 담는 기업 문화와 보상 체계를 손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 떠난 영입 인재들  

지난해 삼성리서치 임원 31명 중 5명이 사임했다. 삼성리서치는 삼성의 통합 연구개발(R&D) 조직으로, AI·로봇공학·데이터과학 등 삼성의 미래 기술을 책임진다. 그런데 글로벌 R&D 협력을 담당하던 승현준 사장과 삼성 글로벌AI 센터장을 맡았던 이동렬 부사장이 지난해 사임했다. 이들은 각각 프린스턴대와 코넬대 교수로 뇌신경공학과 AI 로보틱스 석학으로 꼽혔으며, 지난 2018년 이재용 회장의 ‘뉴 삼성’ 선언 직후 글로벌 인재로 영입됐었다. 승 사장은 가족과 함께 서울에 머물며 의욕적으로 삼성의 AI 전략을 지휘했으나, 이를 제품에 반영하는 방식·시기 등에서 사업부와 견해 차가 있었고 결국 학계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선행연구개발센터인 삼성리서치의 승현준 사장(왼쪽)과 이동렬 부사장이 지난해 회사를 떠났다. 사진 삼성전자

삼성전자 선행연구개발센터인 삼성리서치의 승현준 사장(왼쪽)과 이동렬 부사장이 지난해 회사를 떠났다. 사진 삼성전자

이외에도 삼성의 음성인식 AI ‘빅스비’를 고도화해 삼성 최연소 부사장에 오른 김찬우 부사장, 6G 전문가 권혁준 부사장, 삼성리서치 영국 연구소를 이끌던 임백준 상무가 지난 연말 삼성리서치를 떠났다. AI 플랫폼을 맡던 임근휘 부사장도 퇴사했다. 이들은 각각 구글·마이크로소프트·퀄컴 등 빅테크 기업을 거쳐 삼성의 기술 뿐 아니라 조직 문화 혁신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받던 이들이다. 한국 대기업이 영입한 인재를 잘 관리·활용하는지의 문제가 제기되는 지점이다.

왜 떠나나

인재를 담지 못하는 국내 기업의 문제로 ‘강고한 위계 질서’와 ‘인맥·정치’가 꼽힌다. 국내 대기업 임원으로 영입됐다가 퇴사한 한 교수는 중앙일보에 “나이로 위계질서를 따지고 인맥끼리 끌어주는 문화가 인재 활용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한국·미국의 대기업을 모두 경험한 또 다른 전직 임원은 “복장·근태 규정이나 음주 문화 면에선 한국 기업들이 많이 변했지만, 상사 중심과 사내 정치라는 속살은 그대로”라면서 “미국 기업에선 회식 때 실력있는 동료를 중심으로 대화가 이뤄지는데 한국에서는 매니저인 상사에게 발언권이 집중되는 식이고, 개인 성과 평가도 불투명하다”라고 말했다.

사내 정치는 근무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기업의 해외법인에서 근무하다 미국 반도체 업체로 이직한 한 한국인 엔지니어는 “본사 출신 임원은 해외 법인에서 왕이었다”라면서 “주말에 직원들이 임원 집에 가서 김장까지 담그는 것을 보고 질려서 떠나왔다”라고 말했다.

‘인재 블랙홀’ 엔비디아의 비결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엔비디아는 세계 최고 AI·소프트웨어 인력을 흡수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매년 초 50~100명을 뽑는 엔비디아 인턴십에 올해는 지난해보다 7배나 많은 지원자가 몰리며 실리콘밸리에서도 ‘꿈의 직장’으로 꼽힌다. 특유의 수평적 문화가 인재를 모으는 동력이라고.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엔비디아 인턴을 거쳐 현재 구글에서 근무하는 한 한국인 엔지니어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매년 신입 인턴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한다”면서 “차고까지 구경시켜주며 모든 질문에 상세히 답하는 걸 보고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황 CEO는 별도 집무실 없이 회의실 곳곳을 옮겨 다니며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무시간 상당 부분은 구성원과의 소통으로 보낸다. 부사장급부터 엔지니어 팀원까지 직접 이메일로 연락하며 사업 현안을 챙긴다고도 한다.

19일(현지시간) 전 세계 취재진에 개방된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샌타클래라 시에 위치한 엔비디아 본사 외부 전경. 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전 세계 취재진에 개방된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샌타클래라 시에 위치한 엔비디아 본사 외부 전경. 연합뉴스

젠슨 황은 지난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바이오산업 콘퍼런스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나는 (정리된) 보고서를 읽지 않는다”면서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가장 날것(raw information)의 정보를 원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런 문화는 엔비디아 전반에 퍼져 있다. 엔비디아에 일하는 한 한국인 직원은 “자고 일어나면 이메일이 수백 통씩 쌓여있다”며 “CEO가 기술적 문제에 대해 직접 자세히 묻는 이메일도 종종 온다”고 말했다. 현재 1800명 이상을 모집한다는 엔비디아가 내건 연봉은 14만4000달러~41만4000달러(약 1억9400만~5억5400만원)로 여타 빅테크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활발한 소통과 비전 공유라는 기업문화가 블랙홀처럼 인재를 끌어당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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