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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이종섭 구하기’ 공관장 회의 급조 과연 옳은 일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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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 대사 돌연 귀국 명분이 “방산 공관장 회의 참석”

더 이상 외교가 국내 정치 목적에 휘둘리지 말아야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방산 협력과 관련한 공관장 회의에 참석한다며 21일 귀국했다. 이른바 ‘도주 대사’ 소동 속에 호주로 출국한 지 불과 11일 만의 장면이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 피의자인 이 대사를 서둘러 출국시킨 정부도, 수사를 지연시킨 공수처도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국내 정치에 휘둘리는 우리 외교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대사 귀국을 가장 먼저 발표한 건 방산 관련 공관장 회의를 주재하는 외교부도, 국방부도, 산업부도 아닌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었다. 한 위원장이 지난 20일 오전 “이 대사가 곧 귀국할 것”이라고 밝힌 지 30분이 지나 외교부는 부랴부랴 이를 확인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여당의 비대위원장이 우리 공관장의 출입국을 알리는 스피커로 나선 경우가 그동안 있었을까. 외교가 국내 정치적, 선거용으로 쓰이고 있음을 자인한 셈이다.

호주·사우디아라비아·폴란드 등 6개국 공관장이 참석하는 방산 회의 참석 때문이라고 하는 설명도 궁색하다. 이 대사 출국 후 11일 동안 별다른 방산 관련 돌발 상황도 없었다. 시급성이 있었으면 이 대사의 출국 시기를 25일 회의 참석 뒤로 잡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동안 두 차례 열린 권역별 방산 회의는 모두 현지에서 화상으로 열렸다. 6개국 공관장을 따로 서울로 불러모아 대면 회의를 하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어차피 전 세계 재외공관장이 모두 참석하는 회의가 다음 달 22일이다.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건 ‘이종섭 구하기’를 위한, 급조된 회의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국방부 장관 재직 시절 채 상병 사건 조사 과정에서 외압을 행사한 혐의를 받는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국방부 장관 재직 시절 채 상병 사건 조사 과정에서 외압을 행사한 혐의를 받는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더구나 일부 공관에선 이번 회의가 열리는 걸 외교부 본부가 아닌 뉴스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긴급한 필요도 없는데 사우디·폴란드 등 5개 나라 대사까지 불러들인 것이면 그런 공적 인력, 자원 낭비가 따로 없다. 다 세금을 쓰는 일이다. 어쩔 도리 없이 이 대사를 불러들여야 했다면 떳떳하게 혼자 귀국시키면 될 일이었다.

이런 비정상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문제다. 지난달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제반 사유로 인해”란 이유를 달며 독일 국빈 방문을 불과 나흘 앞두고 전격 취소했다. 해당 기간 대통령 주재의 전국 민생토론회 참석 요인 말고 뚜렷한 ‘제반 사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외교를 국내 정치의 하위 변수로 취급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피해가기 어렵다. 무엇보다 독일·호주 등 해당국들엔 외교적 결례일 수도 있다. 이 대사는 어제 자진 사퇴할 뜻이 없음을 강조했다. 정부에서 ‘회의 참석차 귀국’이라고 했으니 당장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일 게다. 하지만 더 이상 정치 때문에 외교가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본인이 사표를 내건, 정부가 임명을 취소하건 명쾌하게 거취를 매듭지을 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