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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누구 편이냐 강요하는 사회…대화하려면 공용어 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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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판결 너머 자유'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이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판결 너머 자유'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이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자기편’을 늘려 다수를 만드는 게 중요한 사회가 돼가는 걸 보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화합해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이 말은 지금 꼭 해야겠더라고요.

김영란(68) 전 대법관이 최근『판결 너머 자유』(창비)를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란 부제와 함께 펴낸 이유다. 2019년부터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매주 금요일 강의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최근 판례들을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기반해 풀어쓴 책이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김 전 대법관은 “전합 판결문을 분석하면서도 ‘토론 없이 표결만 남은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닌가를 우려했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마저 “편이 갈라져 있고, 개인적‧개성적 표현을 꼭 확연히 남기는 경향이 강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취지에서다.

김 전 대법관은 책 첫머리를 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1972)에 등장하는 ‘전짓불’로 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6‧25 당시 전짓불(손전등 불빛)을 들이대곤 ‘좌익이냐 우익이냐’고 물었던 상황에 평생 공포심을 안고 산다. 국군 편인지, 북한군 편인지 대답을 잘못했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본 탓이다. 김 전 대법관은 “소설을 읽은 건 20대 초반인데, 요즘의 사회를 보면서 문득 여기 나오는 ‘전짓불’이 떠올랐다”며 “‘너는 누구 편이냐’며 택일하라는 추세가 너무 강해진 것 같다”고 했다. 다음은 김 전 대법관과의 일문일답.

본인에게도 전짓불을 들이미는 사람이 있나.
난 획일적이고 정치적인 평가를 좋아하지 않아서 늘 피해 다닌 편이다. 물론 법원에서도 “판사들도 정당 가입 허용하고, 정치적 선택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간혹 있긴 했다. 그런데 난 별로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고, ‘법관은 법으로 말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을 자유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이런 프롤로그를 썼다.
요즘 법관도 정치인 사건을 맡으면 정치적 비난을 받는 일이 잦다.
법에 따라 재판을 했을 뿐인데 ‘성향을 밝히라’는 식으로 요구하거나 비난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세상일수록 재판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법관의 무기는 법뿐이다. 정치인은 정치적 성향을 밝히는 게 일이지만, 법관이 밝히는 건 선택이고, 밝히고 싶지 않은 대다수는 법관 본연의 일을 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전원합의체 판결마저 ‘합의’가 아닌 ‘다수결 대결’로 가면 큰일 아닌가.
노파심이다. 판결문으로는 합의 과정을 다 알 수 없고, 대법관님들은 억울하실 수 있다. 그래도 예전보다 별개‧보충‧반대 의견이 점점 더 많이 붙는 건 명확한 경향이다. 예전엔 ‘이렇게, 저렇게 빼고 한번 합쳐봅시다’라며 합의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많이 거치면 아무래도 수렴하는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각자 의견을 밝혀서 그중에 다수의견이 만들어지면 되지 뭐’ 쪽으로 가지 않나 하는 노파심에서 모범적인 ‘합의’를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다.
합의하려면 설득이 필요한데 의대 증원 논쟁의 경우 준비가 돼 있다고 보나.
서로 다른 신념을 믿고 있더라도 합의를 위해선 공용어를 사용해야 토론이 된다. 의사는 의사 집단의 언어를 떠나고, 정치는 정치적 언어를 떠나서 이성적으로 얘기해야 하는데 지금은 각자 자기네 언어로만 말하고 있다. 책을 쓴 동기의 하나인 젠더 갈등도 마찬가지다. 태어나길 다르게 태어난 것뿐인데 ‘누구 편이냐’ 따지고 싸우는 건 불필요한 갈등이다. 부당한 차별이 있다면 이성적으로 시정해야겠지만 그게 ‘누구 편을 드냐 마냐’의 갈등으로 번지는 건 잘못됐다.
최근 ‘성인지감수성’ 판례 해석에 변화가 있는 데 어떻게 생각하나.

(※2018년 박정화 대법관 판결과 2024년 천대엽 대법관 판결)

‘감수성’은 ‘감성’이 아니다. 얼마나 민감하게 포착하느냐는 이성의 영역인데 둘을 뒤섞어 사용하면서 ‘감수성’에 대한 오해가 근본적으로 있는 것 같다. 성폭력 피해자뿐 아니라 장애인 등 소수자의 감수성을 중시해야 하는 방향성은 궁극적으로 맞는 방향이다. 다만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 성인지 감수성 개념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수용되면서 잠시 부작용으로 생기는 논쟁인 듯하다.
『판결 너머 자유』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 김경록 기자

『판결 너머 자유』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 김경록 기자

첫 여성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에서 여성 대법관 수는 몇명이 있어야할까.
이제 그런 산술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소부당 한 명은 여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대법원에는 총 3개의 소부가 있다) 두 명이면 더 좋고. 다만 여성이라고, 진보 성향이라고 다 여성이나 소수자를 잘 이해하는 건 아니다. 여러모로 열려있고 법리도 뛰어난 분이 되시면 좋겠다.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이 제정된지 9년이 돼간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나.
교수님들이 ‘해외 학회·시상식 초청으로 비즈니스석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받지 못하게 돼있어서 좀 난감한 경우가 많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제가 넣은 게 아니에요’라고 늘 답한다. (식대 등) 금액 논란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거라 역시 내가 한 게 아니다. 하지만 처음 의도보다 직군을 넓히면서 부작용이 있다면 앞으론 직역별 세분화도 필요한 것 같다. 다만 ‘청탁 목적의 사교 행위는 조심해야 한다’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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