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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 말 미국인들이 알게한 감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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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 개봉에 맞춰 내한한 한국계 감독 셀린 송. [사진 CJ ENM]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 개봉에 맞춰 내한한 한국계 감독 셀린 송. [사진 CJ ENM]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결혼은 전생에 8000겁 (만난) 인연의 결과다.”

한국계 셀린 송(36·한국명 송하영) 감독의 영화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말 ‘인연’의 개념을 이런 대사로 설명한다. 영화에선 12살에 한국에서 가족과 이민을 떠난 극작가 노라(그레타 리)가 헤어진 첫사랑 해성(유태오)과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한다. 작가인 백인 남편 아서(존 마가로)와 함께다. 자신을 한국이름 ‘나영’으로 부르는 해성의 한국말을 남편에게 통역하며 노라는 한국에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각본을 겸한 송 감독의 반자전적 이야기로, 미국 영화사 A24와 한국의 CJ ENM이 합작했다. 지난해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 공개된 후, 미국감독조합상 신인감독상, 전미비평가협회 최우수작품상 등 75개 상을 차지했다. 3월 10일(현지시간) 열리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각본상 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아시아계 여성 감독이 데뷔작으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건 96년 오스카 역사상 최초다.

그는 영화 ‘넘버3’ ‘세기말’을 만든 송능한 감독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나 12살에 캐나다로 이민 후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해왔다. 아마존 시리즈 ‘시간의 수레바퀴’, 한국 만재도 해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엔들링스’ 등 이민 1.5세대로서 정체성 고민을 다뤄왔다. 지난달 29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그는 착상의 계기에 대해 “어느 날, 한국에서 놀러 온 어린 시절 친구와 남편과 함께 뉴욕의 바에서 술을 먹는데 둘의 대화를 통역해주다 보니 제가 살아온 정체성·역사의 두 부분을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 인생의 과거·현재·미래가 같이 술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인연’이라는 한국어가 등장한다.
“주인공들의 관계를 인연이란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인연은 작은 관계에도 깊이를 더해준다. 인생을 더 깊게 보게 해주는 파워풀한 단어다.”
제목은 왜 ‘패스트 라이브즈’(전생)인가.
“한 번의 인생에도 전생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간다면, 부산 시절이 전생 같을 수 있다. 다중우주나 판타지가 아니어도, 보통 사람들이 많은 시공간을 지나면서 특별한 인연, 신기한 상황을 겪는다.”
왜 연극이 아닌 영화로 만들었나.
“이 영화의 빌런(악당)은 24년이고, 태평양이다. (웃음) 해성과 나영이 함께할 수 없게 만든 장소와 시간이 중요했다. 서울과 뉴욕 자체가 주인공이다. 두 도시가 얼마나 다른지 시각적으로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마흔이 다 된 어른 안에 12살짜리 어린애가 공존하는 모순을 표현하기에 영화가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동네 골목, 고깃집 등을 찍었다.
“뉴요커만 느낄 수 있는 뉴욕, 서울사람만 느낄 수 있는 서울을 담고 싶었다. 소주 마시는 고깃집도 처음 로케이션 매니저가 찾아준 곳은 느낌이 안 와서, 매니저님이 촬영 끝난 뒤 가고 싶은 고깃집을 알려달라고 해서 찍게 됐다.”

송 감독은 이 영화를 “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이민자의 이야기지만, 새로운 곳에 이주해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진 지금의 보편적 감정을 그렸다”면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만난 관객은 영화를 보고 아일랜드 더블린에 두고 온 여자친구가 기억난다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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