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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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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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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를 본격 도입한 건 1998년 2월이다. 외환위기 직후였다. 기업의 민낯이 드러나자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사회에 외부 전문가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다. 이들에게 기업 내 야당 역할을 기대했다. 나라의 명줄을 쥐고 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사항이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들 진지했다. 그해 9월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A사가 자금난을 겪는 계열사를 지원하려고 했다. 사외이사들이 주주에게 피해를 준다며 반대해 결국 지원은 무산됐다. 곳곳에서 경영진과 사외이사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요새는 드문 풍경이다. 지난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것은 0.4%에 불과했다. ‘거수기’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
기업 감시 초심 잃고 경영진과 유착
지배구조 엉망, 정부 낙하산 악순환
3월 주총 줄대기 전 각자 돌아보길

처음에는 사외이사 보수가 많지 않았다. 급여를 주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 삼성·LG·현대차처럼 큰 기업이 활동비·자문비 명목으로 월 200만원 남짓 지급했다. 포스코는 매달 한 차례 이사회 때마다 50만원의 거마비를 지급했다. 연봉으로 치면 600만원. 지금은 평균 연봉 1억500만원. 화폐가치가 떨어진 점을 감안해도 격세지감이다. 사외이사 연봉 1억원 넘는 기업이 삼성전자·SK·SK텔레콤 등 13곳에 달한다. 이쯤 되면 부업인지,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해 사외이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교수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98년 3월 서울대가 사외이사 겸직을 허용했다. 처음엔 무보수에 한해서였다. 절제된 맛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대 전임 교원 중 9.4%(215명)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물론 보수를 받는다. 교수들은 사외이사 소득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낸다. 서울대가 거둔 돈만 지난 4년간 35억원. 대학과 교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조다. 관료들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사외이사 자리부터 알아본다. 노후 대책으로 이만 한 게 없다.

인맥을 총동원해 기업에 줄을 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기업이 갑이 돼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 적당한 간판에 까다롭지 않은 사람을 환영한다. 바람막이나 대외 로비에 활용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교수와 관료·법조인이 기형적으로 많은 이유다. 지난해 100대 기업 사외이사 457명 중에 42%가 교수다. 기업인은 19%, 관료 15%, 법조인 13%다. 4대 금융지주·은행(KB·하나·우리·신한)은 교수가 특히 많다. 사외이사 50명 중 36명이 교수다.

56년 사외이사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은 정반대다. 사외이사의 80~90%는 풍부한 사업 경험을 가진 전문경영인이다. 경쟁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영입한다. 미국 기업 절반은 사외이사에 교수가 한 명도 없다. 이사회는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해 오픈AI 이사회가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CEO를 전격 해임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세상을 놀라게 한 쿠데타였다.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이사회 결정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국내에서 끝판왕은 포스코, KT, KT&G,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 기업’의 사외이사다. 회사별로 차이는 있으나 업계의 정설은 이렇다. 회장은 가까운 사람을 사외이사로 앉히고,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 사외이사는 회장의 연임을 돕는다. ‘셀프 연임’에 성공한 회장은 다시 사외이사를 연임시킨다. 회장이 물러날 때는 배신하지 않을 측근을 후임 회장에 앉히기도 한다. 견제도 받지 않는다. 명실공히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이다. 기업 지배구조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정부가 만만히 보고 ‘낙하산 인사’를 내리꽂는 것 아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포스코는 지난해 8월 캐나다 호화 이사회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1주일 동안 이사회는 딱 한 번 열었다. 나머지는 전세 헬기를 타고 시찰, 관광, 골프로 6억8000만원을 썼다. 강심장이다. 최정우 회장이 3연임을 노리던 중이었다. 후임 회장을 뽑는 사외이사 7명이 참여했다. 물의를 빚자 사외이사 측은 “새 회장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후보추천위원회의 신뢰를 떨어뜨려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라고 맞받아쳤다. 사과도, 사퇴도 없다. 회사 내에선 “병당 120만원짜리 와인을 곁들인 게 화근”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고급 와인을 먹는 바람에 재수없게 걸렸다는 건가. ‘사심 없이 헌신하라’는 박태준 초대 회장의 창업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세운 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회사에 손실을 끼쳤는지 철저히 수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후임 회장은 뒤틀린 이사회부터 바로잡기 바란다.

3월은 12월 결산법인의 주총 시즌이다. 사외이사 시장도 큰 장이 섰다. 사외이사의 세 가지 자격 요건은 전문성·독립성·도덕성이다. 올봄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막판 줄대기에 바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격을 갖췄는지 돌아봤으면 한다. 초심을 잃고 변질된 사외이사야말로 개혁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