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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다시 정치개혁을 향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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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근대 최고의 한 창조인은 인간의 최고 경지를 놀라는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곤고한 인간사 속에서 근원과 진리, 신비와 오묘함에 대한 놀라움은 실제로 삶의 밝은 빛줄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짧은 한 생에서 그러한 놀람의 경지에 다가가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위의 한 창조인의 말이 맞다면 한국인들은 강제로라도 최고의 경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모른다. 너무 자주 놀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창조인이 말한 놀라움이 본원에 대한 ‘경이’를 말한다면, 한국인들이 체험하는 놀라움은 일상적 ‘경악’을 말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 않나 싶다.

난장판으로 치닫는 한국 정치
좋은 인물·절차·제도 자꾸 배제
사람의 교체로는 더 악화·타락
헌법·정당·검찰 제도개혁 절실

한국인들에게 나날의 경악을 안겨주는 영역은 단연 정치다. 한국의 정치는 계속되는 타락과 퇴행, 졸렬과 저질로 우리를 거의 매일 경악하게 한다. 경악은 이내 일상이 된다. 그러나 “정치는 본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기에는 정치가 우리 삶과 공동체에 너무 중요하며, 또 이 시대 인간 이성과 문명의 발전 정도가 너무 높다. 우리의 정치가 경악의 일상화로 인해 맨날 그 자리로 돌아가 있기를 반복하기에는 정치의 본질과 우리의 문명 수준에 비추어 맞지 않는 것이다.

인류의 선현들은 경제·법률·기술·과학을 이성의 영역으로 본 반면 정치를 예술과 같은 범주로 유비(類比)한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로 본 근대 최고의 한 정치인은 정치가 가진 가능성과 예술의 두 측면을 다 주목한다. 그에게 정치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최고의 결과를 빚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반대로 한 영웅은 정치를 운명에 비유한다. 이 말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정치는 운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것을 스스로 결단했다고 평가받는 이 위대한 영웅에게조차 자신의 결정은, 따라서 정치는, 시대 상황과 요구에 따라간 운명적 선택이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결정한 것이 거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 영웅이 말한 다른 한 뜻은 오늘날엔 ‘정치가 운명’이라는 말이다. 과거에는 운명(fortuna)이 결정하던 것을 지금은 정치가 결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치는 가능의 예술’이라는 말과 ‘정치는 운명’ ‘정치가 운명’이라는 말은 사실 같은 뜻이다. 정치는 마성(魔性), 즉 자신과 다른 의견들 또는 시대 상황과의 타협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들은 마성과 의지 사이에 위치하는 타협과 계약을 제도라는 이름으로 고안해냈다. 정치에 관한 한 제도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나쁜 사람은 활개를 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정치의 필수 요건인 것이다. 근대 들어 인류가 민주공화국을 고안해낸 이유다.

고대 이래 인류는 왜 나쁜 사람들이 정치를 주도하고, 좋은 사람들은 외면하는가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악인 대 악인’ 대결의 악순환을 말한다. 기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의 한때 언명은, 고전에 따르면 왜 악인과 악법이 정치를 주도하는지에 대한 정치(학)의 근본이 먼저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공화와 만나자 민주주의도 살아남았고, 민주와 만나자 공화국은 번영했다. 그전에는 둘 다 극히 단명하였다. 민주가 갖는 직접성·참여성·폭력성·중우성·독임성과 공화가 갖는 대화·타협·분권·대의성·비례성을 결합해 제도화한 것이 바로 민주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대통령과 의원을 포함해 사람을 계속 바꿔도 민주화 이후 여전히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곤두박질치고 있다. 더 이상 사람을 바꾼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인격과 수준, 국량과 능력, 지혜와 실력이 더 작고 더 짧고 더 좁은 대표들이 계속 뽑히고 나라를 이끌고 있는데도? 차선 대 차악이 아니라, 최악 대 최악의 대결로 치닫고 있는데도?

오늘날은 정치가 과거의 운명처럼 집합적 삶을 결정한다. 이제 놀라움을 바꿔야 한다. 나날의 경악을 끝내기 위한 경이를 이룩해야 한다. 나쁜 제도, 즉 나쁜 헌법과 법률, 나쁜 선거와 정당을 혁파하는 우리 자신의 큰 놀라움을 이뤄내야 한다. 좋은 사람과 좋은 절차는 외면·무시되고, 좋은 헌법과 좋은 법률은 제정하지 않는 난장판 같은 이 선거 이후 우리는 정치제도를 속속들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헌법·선거·정당·의회·검찰 개혁에 숱하게 좌절하였지만 다시 들메끈을 동여매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파벌·진영·사사의 이익과 의제만을 앞세우는 이 정치를 예서 뒤집지 않는다면 출산·교육·기후·평화 같은 공화국 존망이 걸린 국가의제·인간의제·공통의제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똑똑히 보고 있듯이 더욱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는 이미 한참 진행된 인구소멸·국가소멸·지방소멸·학교소멸이다. 더 무능하고 더 옹졸한 인간들이 우리의 지도자와 대표가 되는 정치제도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