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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성준이 소리내다

R&D 예산 깎아놓고 "목표도 낮춰라"…실패를 권하는 건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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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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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카르텔 발언 이후 올해 과학기술계의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돼 논란이 일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카르텔 발언 이후 올해 과학기술계의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돼 논란이 일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대학의 겨울 방학은 수업이 없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다. 그런데 올해 초 한국연구재단의 호출을 받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재단이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이해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사실상 통보하는 자리였다. 일을 제쳐두고 먼 걸음을 해 애꿎은 담당자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다음 주 교육부 주관의 연구 사업비가 일괄 삭감됐다는 통보를 e메일로 받았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예고편은 어느새 차가운 현실이 되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펜을 든다.

부족 대학 예산, 연구비로 메워 #대통령 말로 삭감, 기준 불분명 #현장에선 절반 이하로 준 경우도

지난해 12월 21일 국회에서 전년 대비 14.7% 삭감된 R&D 예산 수정안(26조5000억원, 정부 총지출의 3.9%)이 통과됐다. 이후 연구개발 현장에서 들려오는 걱정과 탄식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현장에서 느끼는 연구비 삭감 폭은 20%를 넘어 40%, 심지어 80%까지 이르고 있다. 필자가 참여하는 과기부의 연구개발 사업은 수주 시 협약안 대비 43% 일괄 삭감됐고, 교육부의 다른 연구사업 예산도 21.8% 삭감됐다. 주변을 둘러보니 60~80% 삭감이 흔하고 강제 종료도 있다고 한다.

더구나 국가전략연구 분야라고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까지 통과한 연구개발사업도 큰 폭의 삭감을 피해 갈 수 없었으니, 큰돈 들여서 수년간 예타는 왜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 삭감으로도 연구를 제대로 진행하기 힘든데, 40~60%를 삭감해 놓고 그만큼 연구 성과 목표를 낮춰 수행하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나온 성과물이 80% 성능이라면 실패를 조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 달성할 목표를 내년에 해야 한다면 치열한 기술 패권경쟁의 시대에 낙오자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카르텔을 언급했다. 어떤 분야이든 이권 카르텔이 있어서 공정과 정의를 해친다면 정부가 앞장서서 근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R&D 카르텔이 무엇이고, 예산 비효율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잡아냈어야 한다.

어떤 기준으로 R&D 예산을 삭감했고, 그 삭감 폭보다 더한 삭감을 과학기술 현장에 배분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래 놓고 “내년엔 삭감된 예산을 원상복구 시켜주겠다” “첨단산업 분야에 대한 도전적인 R&D에 파격적인 지원을 하겠다” “과학 대통령으로 기억되겠다” 같은 말만 나온다. 이는 총선을 앞둔 과학기술계 달래기에 불과해 보인다. 최근에 KAIST 졸업식에서 언급된 “이공계 대학원생에게 연구생활장학금을 지원하겠다”는 언급도 삭감된 R&D 예산에서 순수 연구비(재료비·시설장비비 등)를 끌어다가 쓸 요량이면 또 심한 경쟁력 저하를 부추기는 꼴이 될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8월에 배포한 2023~27년도 국가재정운영 계획안을 보면, 국가 총지출 12개 분야 중에서 R&D와 교육 예산만이 전년도 대비 각각 16.6%, 6.9% 삭감됐다. 필자를 포함한 교수들이 심히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연구시설 운영비, 재료비, 이공계 대학원생 인건비 등 응당 정부와 대학이 지출해야 할 비용마저도 교수들이 경쟁해서 수주한 연구비가 아니라면 충당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정부 R&D 예산은 윤석열 정부 마지막 해인 2026년까지도 연평균 0.6% 증액하는 것에 그친다. 이 수치론 지난해 수준도 회복할 수 없다. 이는 “R&D 예산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에서 유지한다”는 과학기술 분야 국정 과제 목표에도 한참 못 미친다. 이런데 ‘과학 대통령’이라는 말을 어찌 믿고 신뢰하란 말인가. 검사로 살아온 윤 대통령이 국가의 과학기술 시스템을 제대로 숙지하기에 1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마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정권에서 영화 ‘판도라’를 관람한 후 “원전 추가건설을 막고 앞으로 탈원전 국가로 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상황과 유사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런 감성적인 결심이 현실적이어야 할 국가 에너지 정책의 근간을 이념과 정쟁의 영역으로 몰아넣었다. 결과는 200조가 넘는 부채를 떠안은 한국전력의 경영 부실과 원전 생태계 파괴로 이어졌다.

현 정부가 하는 일은 과학기술계 카르텔을 핀셋처럼 딱 잡아 뽑아낼 수 없으니, 거의 전 분야를 일괄 삭감한 후 버텨보라는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과학기술자라는 것이 정부 논리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마침 정부는 2025년까지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보도되자마자 대학생, 직장인 등 할 것 없이 의대 입시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허름한 대학 연구실, 정부 출연 연구원, 지식기반 스타트업 등 연구개발 현장에서 20~30대 젊음을 투자하며 안정보다 도전의 삶을 사는 이공계 대학원생과 신진 연구자의 슬픈 자화상이 대비됐다.

국가의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정책은 5년 정권에 따른 부침이 아닌 ‘국가 백년대계’하에서 결정되고 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5년 임기 정권의 이해나 그 어설픔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과학기술·교육·에너지 분야의 국가 시스템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대한민국을 과학기술 패권 시대에 진정한 과학 강국으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답을 구해야 한다.

예성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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