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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옷 아빠 어깨엔 에르메스급 사은품…'패션의 끝' 여기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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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는 곳
2. 패션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종류의 패션이 필요 없는 곳
3. 촌스러울 때 안정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이곳은 어디인가? 

바로 중국 베이징 북서쪽에 있는 하이뎬구(海澱區)다.

베이징 하이뎬구는 중관춘(中關村)을 필두로 한 IT 산업과 높은 교육 수준으로 유명하다. 베이징, 칭화대학 등 최고 명문대를 포함한 유수 대학들이 밀집해 있으며 대규모 인터넷 기업이 모여있다. 한마디로 하이뎬풍은 지식인의 지적인 스타일과 노동자에게 실용적인 스타일을 다 갖춘 패션을 말한다. 얼마 전 ‘패션의 끝은 하이뎬 패션’이라는 말이 웨이보에서 화두로 떠오르며 이번 겨울 ‘하이뎬풍 패션’에 중국 네티즌의 이목이 쏠렸다.

하이뎬풍 패션의 핵심을 한 단어로 말하면 ‘블랙’이다. 지하철 안만 봐도 온통 검은 물결이다. 하이뎬 사람들이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친구와 헤어지면 서로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 하이뎬구 지하철 안 모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 하이뎬구 지하철 안 모습

하이뎬 사람들 ‘머리만 감고 후다닥 출근’, 최소한의 청결과 방한에만 집중…

하이뎬구 중관춘

하이뎬구 중관춘

25세 하이뎬의 공무원 후양양(胡陽陽)씨는 하이뎬 사람들에게 옷은 ‘먼지와 연기 속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양양 본인도 여느 하이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올해 베이징에서 가장 먼저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젊은이가 됐다.

하이뎬 사람들이 검정 옷을 즐겨 입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사실 패션뿐만 아니라 하이뎬구 전체가 흑회색인 편이다. 과학 연구 기관, 교육기관, 군사 시설, 오래된 주거 단지가 모여 있는 하이뎬구에는 중국의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황장(黃莊)도 속해있다. 하이뎬 지역의 학부모들은 학부모 모임을 갈 때도 옷차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 옷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옷으로 기 싸움을 하는 일도 없다.

상대적으로 고정된 패턴과 지리적 문화를 지닌 하이뎬은 유행을 좇아 금방금방 바뀌기 어려운 곳이다. 본질을 중시하는 이곳의 특징이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빠서 자기 관리도 못 하는데 누가 뭘 입고 왔는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하이뎬 사람들은 말한다. 겉모습보다 내면을 더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입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청결과 체면을 중심에 둔 단순하고 절제된 옷차림을 발전시켰다.

하이뎬 사람들의 ‘획일’ 문화 

하이뎬구에 있는 즈춘루(知春路)를 거니는 가장들은 손에 항상 ‘모 연구소’, ‘모 국가 실험실’이라고 적힌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어깨에 멘 에코백은 애들 학원에서 받은 사은품이다. 학원비로 연간 수십만 위안을 내는데 들인 돈으로 따지면 에르메스 가방 못지않다. 팔에 걸친 아이 교복은 보라색과 빨간색으로 각각 칭화대 부속 중학교와 인민대 부속 중학교의 간판 색이다.

하이뎬구 우다오커우 지역의 대학생은 세계에서 가장 유행을 안 타는 대학생이다. 날이 추워지면 학교 로고가 박힌 검정 롱 패딩만 주구장창 입는다. 심지어 고3 때 소매에 끼던 팔토시를 그대로 사용하는 학생도 많다.

베이징 대학 로고가 적힌 롱패딩을 입은 학생

베이징 대학 로고가 적힌 롱패딩을 입은 학생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호적, 출신 대학, 직장이다.

베이징 동쪽에 위치한 차오양구(朝陽區)에서 하이뎬구로 출근하는 둬둬(多多) 씨는 직장 생활 초창기에 ‘하이톈풍 패션’에 동화되기 싫었다고 한다.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 반 가까이 되더라도 그녀는 더 일찍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했다. 그런데 하이뎬구에 들어서기만 하면 항상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특히 지하철을 타면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자신을 무슨 돌연변이 보듯 주목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둬둬 씨는 옷차림이나 인플루언서들이 다녀온 유명 식당에 가본다고 자신감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이뎬 사람들의 생활은 일정한 궤도를 따라 흐른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학창 시절 스케줄을 이어가며 비슷하게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확립해 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이뎬에서 ‘촌스러움’은 곧 안정감이자 소속감 

하이뎬풍 패션은 기능성과 실용성에 더욱 집중한다. 이로써 옷의 본질을 되찾음과 동시에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능력을 드러낸다. 칭화대, 베이징대 로고가 박힌 패딩을 입고 연구원 에코백을 멘 사람들이 바로 그 예다.

롱패딩과 에코백은 우다커우 지역 박사생의 패션템이다.

롱패딩과 에코백은 우다커우 지역 박사생의 패션템이다.

패션의 관점에서만 보고 하이뎬을 촌스럽다고 한다면 조금 섭섭하다. 중국 최고 대학을 포함한 유수 대학들이 모여 있고, 이곳을 구성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똑똑하고 생기 넘치는 이팔청춘들인데, 어떻게 유행에 뒤떨어질 수가 있을까? 하이뎬은 본래 '촌스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하이뎬 학생들은 옷을 고르고 입는 데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일에 쏟고자 한다.

크록스와 검정 츄리닝은 하이뎬 대학생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 조합이다.

크록스와 검정 츄리닝은 하이뎬 대학생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 조합이다.

26세의 사오왕(小王) 씨는 베이징 차오양에 위치한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전부터 하이뎬에 있는 큰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만약 차오양이었다면 신상 맛집을 모르면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베이징 차오양 젊은이들은 신상 카페나 팝업스토어 등 핫플 도장 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맛도 맛이지만 분위기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이뎬에 있는 식당은 아무리 잘 꾸며놔도 근처에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만 주로 찾는다. 온전히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인증샷 남기려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은 찾기 힘들다.

베이징 각지의 소비 개념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지만, 하이뎬의 삶과 소비문화는 그 자체로 확고한 형태를 갖춰 왔다. 변화하는 주변 환경 따라 외모를 가꾸고 업데이트할 필요가 없다. 지루하고 틀에 박힌 듯한 이 스타일은 외모 걱정, 몸매 걱정, 옷 걱정을 잠재울 수 있다.

검정 롱 패딩, 경량 패딩, 바람막이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고전적인 스타일은 어떤 몸매도 가려줄 수 있고 어디에나 잘 어울리며 주머니 사정이 팍팍한 젊은이들까지 만족하게 했다.

지난가을 하이뎬풍 패션의 진수는 바람막이였다. 남녀 불문하고 직업과 출퇴근 방식도 상관없이 바람막이를 안 입은 하이뎬 사람들이 없었다. 패션에 무심한 이곳 사람들의 태도가, 오히려 하이뎬 특유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고, 지금은 뜻밖에도 하이뎬 패션이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박지후 차이나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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