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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합의 10년, 북·일 정상회담 성사될까…“넘어야 할 허들 많아”

중앙일보

입력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북·일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밝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에 호응하는 담화를 내놓은 데에 대해 16일 전문가 사이에선 "넘어야 할 허들이 많아 성사 가능성을 낙관할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한·미·일 대북 협력관계를 흔들려는 '통일봉남(通日封南) 전술'의 일환이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앞서 김여정은 1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일본이 우리의 정당방위권에 대해 부당하게 걸고드는 악습을 털어버리고 이미 해결된 납치 문제를 양국 관계 전망의 장애물로만 놓지 않는다면 두 나라가 가까워지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기시다)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외에서 북·일 정상회담 실현 여부에 대한 다양한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2014년 상황에 주목했다. 당시 북한은 2013년 2월에 3차 핵실험을 감행한 이후 국제사회의 전방위 제재로 고립 위기에 놓였다. 드레스덴 제안(2014년 3월)을 내놓은 박근혜 정부를 향해 '흡수통일 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망발'이라고 비판하는 등 남북관계도 긴장 상태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유엔본부 제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유엔본부 제공

이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돌파구로 일본을 선택했다. 일본 정부의 독자 제재와 북한의 중요한 자금줄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다목적 포석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 입장에서도 최대 현안인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의 해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질 좋은 기회였다.

이런 이해관계 속에서 시작된 북·일 협상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 조사와 대북제재 해제에 대해 전향적인 합의를 이뤘던 '스톡홀름 합의'(2014년 4월)로 결실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올해로 스톡홀름 합의가 10주년을 맞는다.

앞서 북한은 지난달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지진 피해가 발생하자 김정은이 직접 기시다 총리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기시다 총리에 '각하'라는 깍듯한 호칭까지 썼다. 서보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김정은의 일본 지진 위로 서한의 배경과 함의')에서 "한·미·일 대북 협력관계 약화를 노린 통일봉남 전술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며 "지지율 바닥을 보이는 기시다 정권을 자극하고 인도적 문제를 소재 삼아 일·북 대화를 추진할 의향을 표명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김여정은 전날 담화에서 비핵화·미사일 관련 논의와 일본인 납북자 문제는 아예 논의하지 않는 걸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걸었다. 이를 두고 외교가와 전문가들은 북한이 한국·쿠바 수교에 성급하게 대응하려다 한·미·일 공조의 틈을 벌릴 기회를 오히려 놓치려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입장에선 납북자 문제는 "국가적 과제"(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15일)로 부릴 만큼 양국 관계에 핵심 이슈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기시다 총리가 외교적 승부수로 돌파구를 찾는 것을 기대하는 눈치지만, 납치자 문제의 진전없는 회담은 기시다에겐 오히려 정치 생명을 끝내는 악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김여정 담화와 관련한 질문에 "'납치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고 언급한 데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납치와 핵·미사일 등 여러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한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일본 국회에서 시정 방침 연설을 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일본 국회에서 시정 방침 연설을 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 연합뉴스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1970~1980년대 자국민 17명이 북한으로 납치돼 12명이 북한에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12명 중 8명이 사망했고 4명은 아예 오지 않았다며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고 맞서왔다.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문제도 국민 안전에 걸려있는 사안이라 일본 입장에선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축으로 하는 한·미·일 협력과도 연계돼 있어 일본 정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일 간에는 납치자·미사일·북핵 문제를 비롯해 넘어야 할 허들이 많다"며 "일본 입장에선 이런 핵심 사안을 대화 테이블에 올리지 않는다면 정상회담이 성사된다고 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회 회원들이 지난해 3월 도쿄에서 회의를 열고 있다. 이들은 납치 피해자전원의 귀국이 성사되면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세 번째 메시지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회 회원들이 지난해 3월 도쿄에서 회의를 열고 있다. 이들은 납치 피해자전원의 귀국이 성사되면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세 번째 메시지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물론 상황에 따라 김정은과 기시다 총리의 회담이 전격적으로 성사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앞서 북한과 일본이 지난해 최소 두 차례에 걸쳐 동남아 국가에서 비밀 접촉을 가졌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이에 관련, 일본 정부도 "사안의 성격상 답변을 자제하겠다"면서도 명시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 상황의 진전에 따라 일본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방북(2002·2004년)이나 스톡홀름 합의 당시와 같이 한국의 '중재' 없이 북한과 만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외교부 관계자는 이날 "일·북 접촉은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안정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며 "정부는 일·북 접촉을 포함하여 북핵·북한 문제 관련 일측과 긴밀히 소통 중이며, 한·미·일은 북한을 비핵화의 길로 복구시키기 위해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왼쪽) 당시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에서 북일평양선언에 서명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왼쪽) 당시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에서 북일평양선언에 서명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에 북·일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수요가 있는 기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등판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런 경우에는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의 실현을 위해 대화의 문턱을 낮춘다는 명분으로 북한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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