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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가봤나” 실종된 롯데…신동빈, 칼 빼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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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롯데 연구 ① 신동빈호 ‘부활의 조건’

경제+

동네 편의점부터 과자·햄버거까지 롯데는 생활 속에 있는 기업이다. 서울 잠실에 우뚝 선 롯데월드타워는 세계적인 볼거리가 됐다. 자산이 130조원 가까이 되니 덩치도 상당하다. 더중앙플러스의 ‘기업연구’ 시리즈가 국내 대표 유통기업이자 재계 6위 롯데의 변곡점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보수적인 기업문화에서 ‘일등’을 화두로 삼고 인수합병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한 배경과 지정학 악재, 오너 사법 리스크를 겪으면서 어떤 변화를 선택했는지 짚어본다. 유통에서 사세를 키워 화학·바이오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과정도 분석한다.

1. “후계 신동빈” 신격호 유언장…‘형제의 난’은 사실상 마침표

신격호

신격호

“바이오테크놀로지와 메타버스, 수소, 2차전지 등 4개 신성장 영역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부진한 사업은 매각하겠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달 30일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사업 재편에 대한 구체적인 의지를 밝혔다. 그는 “그동안 크고 작은 회사 60곳 정도를 매수했지만, 지금은 방침을 바꿔 매수뿐 아니라 매각도 일부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이 칼을 빼 든 데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2020년 6월 공개된 고(故) 신격호(1922~2020) 명예회장의 자필 유언장 내용은 짧지만 무거웠다. “사후에 한국과 일본, 그 외 지역의 롯데그룹은 신동빈이 승계한다”, “신동주는 연구개발을 돕고 경영에 관여하지 마라” 등이 담겼다. 서명 날짜는 2000년 3월 4일이었다. 이미 20년 전 유일한 후계자를 지목했다는 얘기다. 이로써 2015년 시작된 신동빈-동주 형제간 경영권 분쟁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승패는 갈렸지만, 상처는 컸다. 롯데그룹의 거미줄 지배구조가 그대로 노출됐다. 계열사 80여 개를 잇는 순환출자 고리만 75만 개에 달했다. 오죽하면 ‘컴퓨터 회로 같다’고 했을까. 일본 기업이 아니냐는 해묵은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2015년 7월 말 KBS 9시 뉴스가 기름을 부었다. 첫 뉴스에서 신격호·동주 부자(父子)가 일본어로 나눈 대화가 그대로 전파를 탔다. 식품·유통·호텔 등 소비재가 주력인 롯데에 이미지 추락은 실적 하락과 직결된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았다. 이번엔 중국발(發)이었다. 2017년 2월 성주골프장 부지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부지로 제공하면서 중국 현지법인이 세무조사, 무기한 영업정지 등 보복을 당했다.

2. 사드·노재팬·사법 리스크에…10년새 ‘몸값’ 3분의 1 날려 

1986년 7월 골프 모임을 한(왼쪽부터) 류찬우 풍산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박태준 포스코 회장,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1986년 7월 골프 모임을 한(왼쪽부터) 류찬우 풍산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박태준 포스코 회장,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결국 롯데는 중국 내 대형마트(112개)·백화점(5개) 사업, 음료·제과 공장에서 손을 뗀다. 철수하면서 5조원대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신 회장은 이듬해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면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다. 면세점 신규 특허 취득과 관련해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제공한 혐의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지만, 롯데는 8개월간 총수 부재 상황을 겪었다.

이장희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정학적 악재에다 코로나19, 노 재팬 등에 따른 실적 부진을 포함하면 롯데는 5~6년간 한꺼번에 ‘5중고’를 겪은 셈”이라고 말했다.

울산 울주군에 있는 신 명예회장 묘역에는 ‘거기 가봤나?’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화강암이 있다. 고인의 경영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신 회장은 요리우리신문 인터뷰에서 “아버지로부터 ‘현장에 가서 자기 눈으로 보라’ ‘보고만 듣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며 “사람은 습성상 나쁜 정보를 전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사실은 어떤지 반드시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울산 울주군에 있는 고 신 명예회장 묘역 와석에 ‘거기 가봤나?’란 글귀가 적혀 있다. [사진 롯데·울산대]

울산 울주군에 있는 고 신 명예회장 묘역 와석에 ‘거기 가봤나?’란 글귀가 적혀 있다. [사진 롯데·울산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이 “이봐 해보기나 했어” 하며 임직원의 도전 의지를 북돋웠다면, 신 명예회장은 현장과 근면·성실함을 강조하는 ‘가봤어 DNA’를 전수한 셈이다.

롯데 전직 중역들은 인터뷰에서 “투자 보고서를 들고 가면 신 명예회장은 먼저 ‘가봤나’라고 질문한다. 그러곤 의지가 굳으면 ‘해보자’고 단답으로 말씀하신다. 길어 봐야 다섯 번 보고하면 결론이 난다. 이런 ‘신격호식 속도’를 잃어버린 지 5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롯데쇼핑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5.9% 줄어든 14조5559억원을 기록했다. 최근 3년 새 16조1844억원(2020년)→15조5736억원(21년)→15조4760억원(22년)에 이어 지속적으로 외형이 쪼그라들었다. 디지털 대응이 늦어진 게 결정적 요인이다. 온라인 쇼핑몰 롯데온의 시장 점유율은 5%에 그친다.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적자 상태다. ‘유통 1번지’란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이력으로만 따지면 의아한 일이다. 롯데는 쿠팡이 탄생하기 14년 전인 1996년 국내 최초 인터넷 쇼핑몰인 ‘롯데인터넷백화점(현 롯데온)’을 오픈했다. 2014년부터는 신동빈 회장이 온·오프라인 채널을 연계하는 옴니채널을 그룹의 신성장 동력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롯데 유통군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전직 임원은 ‘사람’에서 이유를 찾는다. “롯데는 각 계열사에서 온라인 담당자를 차출하고 경쟁사에서 전문가 몇 명을 데려와 이커머스 조직을 꾸렸다. 이러면 A급 인재를 구할 수가 없다. 사업이 안 되니 담당자들만 책임지고 나오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성장 둔화에 시장 평가는 냉담해졌다. 롯데그룹 자산총액은 2013년 87조5230억원에서 지난해 129조6570억원으로 10년 새 1.48배 증가했다. SK(2.33배)나 LG(1.67배), 포스코(1.63배), 현대차(1.62배), 삼성(1.59배) 등 주요 그룹과 비교해 증가 속도가 가장 더디다. (공정거래위원회) 2003→2013년 4.22배와 견줘서도 3분의 1에 그친다.

3. 순환출자 고리 끊어낸 건 성과…“핵심 역량 살려 신시장 개척을”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지난해 말 롯데그룹 11개 상장사 시가총액은 총 19조9528억원으로, 2013년 28조9112억원보다 31% 줄었다. 기업 가치의 3분의 1 가까이가 날아간 셈이다. 간판 계열사인 롯데쇼핑(-83.3%), 롯데케미칼(-17.6%), 롯데칠성음료(-27.9%)도 박한 평가를 받았다.

같은 기간 LG(11개)와 포스코(6개), SK(21개), 삼성(17개) 계열사 시총은 각각 175.2%, 165.1%, 156.8%, 138.2% 뛰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롯데그룹 상장사 시총 합계는 삼성(657조4043억원), LG(186조3286억원), SK(179조4131억원), 현대차(133조2081억원), 포스코(93조8751억원) 그룹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주회사 출범을 계기로 복잡다단한 연결고리 실타래를 풀었다. 롯데제과(현 롯데웰푸드)와 롯데쇼핑, 롯데칠성음료, 롯데푸드 등 4개 상장사의 투자부문을 떼어내 롯데지주를 출범시켰다. 또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진출을 통해 신시장 개척 기회를 모색 중이다.

원지성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핵심 역량이 핵심 경직성이 된다는 말처럼 오프라인을 포기할 수 없는 구조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가기 어려운 면이 있다”며 “롯데는 기존에 보유한 효율적 물류 시스템과 오랫동안 누적해 온 고객 데이터를 활용해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한민국 쇼핑 1번지, 롯데의 변곡점을 짚어봅니다. 더중플에서 롯데의 역사와 미래를 더 자세히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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