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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다크호스를 제거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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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 외국인 유튜버의 한국 여행기가 화제가 되었다. 여행기는 한국에 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첨단기술과 문화산업의 약진으로 한국이라는 국가는 각광을 받고 있는데, 정작 한국 사람들은 왜 불행감에 시달리고 있을까. 그가 찾은 답은 압축적 성장을 거친 한국이 유교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의 단점만 취했다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 체면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으로 사람들은 늘 불안하다는 것이다. 주범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육문제는 우리 방 안의 코끼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여성의 경력 단절과 출생률 급감도, 부동산 문제와 지역 소멸도, 노인 빈곤 문제에도 교육이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청소년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행복하지 못한 청소년이 자라서 행복한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의대 광풍이 보여준 경쟁주의 단면
청소년·부모 모두 불행하게 만들어
국가교육위원회는 무엇하고 있나
교육개혁 멈춰서면 미래도 멈춘다

인공지능의 진화로 세상의 변화는 몇 배속으로 빨라졌다. 분야를 막론하고 주어진 질문에 빨리 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답에 태클을 걸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미래의 리더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가장 대체 불가능하고 희소성이 있는 것은 결국 각자가 가진 ‘나다움’이다. 나다움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성장은 낯선 상황에 나를 던져보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딴짓과 멍때리기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기성세대에게 성장기의 좌충우돌이 시간 낭비였다면, 지금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나다움이 만들어지고 불확실성을 견뎌내는 단단한 근력이 길러진다.

하버드 교육대학원 교수 토드 로즈는 저서 『다크호스』를 통해 표준화된 성공 공식을 좇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오히려 개인의 행복을 해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표준화된 성공공식은) 개인이 가진 잠재력을 저평가한다. 무엇보다 큰 독소는 각자가 가진 개성에 맞지 않는 길을 쫓아가라고 해놓고, 그 길 위에서 헤매면 실패라고 손가락질하며 개인의 잘못인 것마냥 자책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의 눈을 경주마처럼 가리고 달리게 하고 있다.

의대 광풍 현상은 ‘한국 교육은 박찬호에게 아인슈타인이 되라고 한다’는 한 외국인 교수의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공부를 좀 한다는 자녀를 가진 많은 부모가 ‘의치한약수’(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를 향해 어릴 때부터 훈련에 나선다. 수도권 최고대학에서도 신입생들은 미처 전공의 맛을 보기도 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학원가에 초등학생 의대 반이 생긴 지는 이미 오래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내 방식대로 아이들을 키우겠다 심지 굳게 마음 먹기는 쉽지 않다. 혼자 조용히 망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도 이해하지만, 현재의 잣대로 미래를 살아갈 자녀의 인생을 안전한 지름길로 안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위험하고 무모하다.

대학의 문제는 더 크다. 현재의 대학은 학생들이 세상을 넓게 보고 나다움을 성찰하며 미래를 탐색할 기회를 충분히 주는 데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학생들은 입시만 보고 달린다. 다양한 학문의 세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고려보다는 합격선에 맞추어 전공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대학에 와서 자신의 적성이나 선호를 발견한들 불행히도 학과 간 칸막이는 공고해서 전공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분야도 있고 새로이 구성되거나 팽창하는 분야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학 학과와 전공 구성의 기본 틀은 30여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들은 상당히 제한된 정보와 선택지 안에 꽃 같은 시간을 욱여넣을 수밖에 없다.

교육부가 입학 후 전공을 정하는 무전공 선발의 확대를 시도했다가 반발에 부딪혔다. 제반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거친 시도라고는 하나 기존 학과 중심의 꽉 막힌 학사제도를 대학 스스로는 개혁을 못 하니 고육지책으로 외부 자극에 나선 것이다. 현 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여지없이 ‘취지는 이해하나 성급하다’ ‘제반 여건이 안 되어 있다’는 반발에 부딪혔고, 이것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장관의 결기도 3주 만에 기존 안을 철회하면서 꺾이고야 말았다. 방향성만 동의하고 속도가 수반되지 않는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교육은 그 어떤 분야보다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야 하는 부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저 파괴로 치닫거나 혹은 파괴에 따른 반발이 두려워 첫걸음도 떼지 못하는 상황이다. 3대 개혁의 하나로 교육개혁을 하겠다던 이 정부가 중장기 교육정책의 방향을 마련한다면서 출범시킨 국가교육위원회는 중장기 정책은커녕 조용하기만 해서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교육을 방 안의 코끼리로 만든 역대 정부의 무책임한 방임, 변하지 않는 대학, 불안을 먹고 사는 학원 카르텔, 이들이 원팀이 되어 기를 쓰고 미래를 이끌어갈 다크호스들을 조용히 제거하고 있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