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총수 중심 지배구조, 인도∙태국보다 기업 경쟁력 떨어져 [코리아 디스카운트 끝내자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 기업의 후진적인 지배구조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힌다. 주주의 이익보다 대주주(총수)의 이익에 집중하는 지배구조를 유지하면서 ‘책임 경영’을 회피하는 구조가 고착화해 기업가치 하락은 물론, 외부 공격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에 따르면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 평가 결과는 아시아 주요 국가 12개국 중 9위(2020년 기준)였다. 말레이시아(5위), 인도(7위), 태국(8위)에도 밀린다. 7개 부문 평가에서 한국은 소수 주주 보호 장치나 이사회‧고위급 임원에 대한 교육 훈련, 감사‧감독 업무에 관한 정보 수준이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취약한 지배구조→기업 경쟁력 약화→기업 가치 저평가’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총수에 이익 집중…소액주주 홀대 

국내 주요 대기업 계열사들은 각 회사별로 ‘독립적 법인’임에도 주주 이익을 대변해야할 이사회가 주주보단 총수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사회들이 총수의 거수기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국내 지주회사(28개)의 이사회 원안 가결률(2023년 5월)은 99.24%로, 반대가 거의 없었다.

사업‧경영, 인사, 자금, 특수관계거래 같은 현안에 대한 반대는 1%도 안 됐다. 대기업 계열사들이 자·손자회사를 물적분할한 후 상장하는 중복(쪼개기) 상장을 통해 기존 주주의 이익을 침해해도, 이사회에서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사회 구성원이 기업 근무 경험이 없거나 산업 전문성이 떨어지면 투자안 검토나 조언은 커녕 업무 감독도 어렵지 않겠느냐”며 “이사회의 전문성을 강화해 이사회 중심 경영을 실현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총수들이 두둑한 연봉을 챙기면서도 경영상 책임은 회피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됐다. 국내 64개 대기업집단(2023년 5월 기준)의 계열사 2602곳 중 총수가 이사로 등기한 곳은 118곳(4.5%)에 불과하다. 총수 일가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433곳(16.6%)뿐이다. 등기 이사가 아니면 총수라도 각종 법적 책임에서 제외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책임 경영뿐 아니라 글로벌 리더십 강화를 통한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총수의 이사 등기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사회 역할 확대…단기 투기세력 공격 견제해야

한국 기업들의 취약한 지배구조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단골 공격 소재가 됐다. ‘주주 이익 강화’를 외치는 이들은 설비투자나 인수합병(M&A) 등 기업의 장기 성장을 위해 투자하기보다 주주 배당과 자사주 소각 등에 이익을 우선 배분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경제계는 이런 방식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수익률 중심의 단기 투자자에게 기업이 휘둘리면 기업 성장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임원은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를 약점 삼아 공격하는 그들의 목적은 단기적인 투자 이익 실현이기에, 한국 기업들이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일자리 증대나 설비 투자에는 무관심하다”며 “이들에 끌려다니지 않고 기업의 장기 성장을 지원하려면 경영권 방어 수단도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경제계는 단기 투기 세력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복수(차등) 의결권 도입을 주장해왔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복수의결권 제도는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나 창업자의 보유 주식에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로, 기업 지배주주의 적대적 M&A 방어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선 벤처기업에 한해 도입하도록 관련 법이 개정돼 지난해 11월부터 시행 중이다. 대기업에 복수의결권을 적용하는 안은 경영권 승계에 이용될 수 있다는 반대가 커서 도입되지 않고 있다.

김순석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복수의결권은 지배주주가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기업공개를 통한 용이한 자금조달 등의 장점이 많다”며 “다만 소액 주주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하고 비상장 회사부터 제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총수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힌 계열사 간 소유 구조를 단순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경서 교수는 “새로 편입·설립된 자회사의 상장을 제한해 주주 이익을 보호하고, 모회사가 자회사의 100% 지분을 소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