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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없는 중졸의 화가…이건희가 그에게 주문한 그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이건희 전속화가 박대성

이건희·홍라희 마스터피스

‘이건희컬렉션’의 대표작은 국보 ‘인왕제색도’입니다. 훼손을 막기 위해 전시 기간에 제한을 두고 다른 작품과 번갈아 겁니다. 2022년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때 인왕제색도와 교대로 선보인 그림이 박대성의 ‘불국설경(佛國雪景)’입니다. 박대성은 이 회장과의 기억을 간직한 몇 안 되는 생존 화가입니다. 36년 전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요.

6개월 넘게 끙끙대고 그린 ‘불국설경’ 앞에 박대성 화백이 앉았다. 경주에 7년 만에 눈 내린 1996년의 겨울날 새벽, 불국사의 적요를 눈감고 떠올렸다. 화면 좌우에 ‘천지인화(天地人和)’ ‘석양홍(夕陽紅)’ 붉은 낙관이 선명하다. 경주=권혁재 사진전문기자

6개월 넘게 끙끙대고 그린 ‘불국설경’ 앞에 박대성 화백이 앉았다. 경주에 7년 만에 눈 내린 1996년의 겨울날 새벽, 불국사의 적요를 눈감고 떠올렸다. 화면 좌우에 ‘천지인화(天地人和)’ ‘석양홍(夕陽紅)’ 붉은 낙관이 선명하다. 경주=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존경합니다.” 1988년 4월,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8층 집무실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세 살 아래 한국화가 박대성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화가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왜요?”(박대성) “뭐든 상위 1~2%까지 오르는 사람이면 제겐 존경의 대상입니다. 강도일지라도요.”(이건희)

그 자리에서 이건희는 새 그림을 주문했다. 후에 박대성이 금강산도를 그려 보내면서 ‘이건희의 전속 화가’가 됐다. 당시 박대성은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친 참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던 호암갤러리가 서울대, 홍대 출신도 아닌, 중졸의 43세 한국화가 박대성을 택했다. 박대성은 “650평 전시장을 무슨 수로 채우느냐”며 석 달을 사양하다 마침내 광목에 먹과 수채로 제주의 설경을,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일출봉을 그렸다. 관객 수, 도록 판매, 작품 판매까지 전시는 성공이었다. 전시작 중 일부는 2021년 ‘이건희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됐다.

박대성도 초면의 이건희에게 청을 하나 했다. “중국에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전이었다. 삼성물산 홍콩지사 도움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희는 여비까지 챙겨줬다. 그렇게 중국화의 거장 리커란(李可染·1907~89)을 만났다. 병석에 있던 리커란은 박대성의 호암갤러리 전시 도록을 보고 “기초를 잘 닦았다”며 탄복했다. “글씨를 잘 써 봐라” “먹이 제일 기초다” 등 조언도 했다.

박대성은 경북 청도에서 나고 자랐다. 5살 때 빨치산이 휘두른 낫에 왼손을 잃었다. 아이들에게 놀림 받으며 중학교만 겨우 마쳤다. 순탄치 않은 삶이었지만, 다행히도 도처에 스승이 있었다. 18세에 친척 어른 소개로 호랑이 그림의 대가인 서정묵에게 배웠다. 시인 구상(1919~2004)은 자신의 친구 이중섭 얘기를 들려줬다. “중섭은 실제로 보고 옮기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그저 보는 걸 넘어 사물 자체에 투철하게 들어가는 ‘관입실재(觀入實在)’를 당부했다. 그렇게 배우며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내리 8번 입선했다.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첫해에 입선, 2회에 대상을 받았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대만으로, 히말라야로. 모더니즘을 배우겠다며 뉴욕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불현듯 경주에 가야겠다 작심했다. 절에 간청해 요사채에 1년간 머물렀다. 그 겨울(1996) ‘불국설경’이 나왔다. 경주에 7년 만에 눈이 내린 날이었다. ‘불국설경’은 총 네 점, 이 중 하나가 이건희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은 “이건희 회장 생일이 1월 초라 세배 겸 생일 선물로 드렸던 그림”이라며 “시리즈 중 비교적 작은 크기여서 가까이 걸어두시라고 선물했다”고 돌아봤다. 이 그림 왼편에 박대성은 이렇게 적었다. “이곳에 실상은 생멸이 없지만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있음이요 모두가 다 한 상의 꿈일 뿐이니…”

우리 나이로 팔순, 박대성은 지금도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한다. “붓 몇 개 가지고도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게 꿈입니다. 많은 얘기 않고 오로지 필묵으로만.”

◆내달 24일까지 박대성 개인전=박대성의 그림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다음달 24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소산비경’에서 볼 수 있다. 경주 솔거미술관에도 상설전시실이 있다. 그는 2015년 이곳에 ‘불국설경’을 비롯한 그림 435점과 서예·도자기 등 830점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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