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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심리한 두 재판부, 판단은 엇갈렸다…임종헌 유·무죄 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의 마지막 사건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5일 1심 법원의 판단과 열흘 전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1심 판결 사이엔 엇갈리는 대목이 많았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임 전 차장이 사법행정 실무를 총괄한 만큼 양 전 대법원장의 지난달 26일 판결문엔 ‘실행행위자 임종헌’이란 표현이 56번이나 등장했다. 다수의 공소사실이 겹치는 임 전 차장의 행위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대부분 “직권남용은 아니다”라고 봤지만, 일부는 “직권남용이 맞다”는 판단도 담았다.

그러나 열흘 뒤 당사자인 임 전 차장의 1심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형사 36-1부(부장판사 김현순‧조승우‧방윤섭)의 판단은 달랐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가 ‘유죄’로 본 행위들을 임 전 차장 재판부는 ‘무죄’로 봤기 때문이다. 그간 법원 내에서 “두 재판부가 서로 소통을 하지 않아 같은 사실에 대해 다른 판결을 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왔는데 현실이 된 것이다.

두 재판부가 공통으로 ‘유죄’로 본 건 법원행정처가 통합진보당 지방의원의 행정소송에 개입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허위 해명자료를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부분이다. 재판부는 “행정처의 잘못을 감추기에 급급한 행위로 사법부는 공정하고 정의로울 것이라는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으로 비난 가능성이 큰 범죄”라고 질타했다.

“직권남용” vs“재판개입 권한 없어 무죄”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나머지 부분에선 두 재판부의 판단이 대부분 달랐다. 양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서기호 전 국회의원 연임부적격 결정취소소송과 관련해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및 재판 담당 판사에게 일정을 묻거나 입장을 전달한 행위에 대해 “재판개입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임 전 차장 사건 재판부는 무죄 판단을 내렸다. 헌법상 법관의 재판상 독립이 보장돼있고, 재판에 개입할 권한은 임 전 차장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에 권한이 없어 직권남용도 될 수 없다는 취지다.

앞서 항소심까지 진행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서도 임 전 차장 재판부는 판단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행정처 심의관에게 ‘남부지법 위헌제청결정’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등과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데 대해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이규진 전 위원의 직권남용은 인정했는데, 임 전 차장 재판부는 “임종헌의 관여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라고 판단했다. 다만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통해 정보를 빼낸 데 대해선 두 재판부 모두 “직권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이 부분은 이 전 상임위원에 대해 항소심까지 유죄가 선고된 부분으로, 이 전 위원에게 지시를 내린 임 전 차장도 유죄가 그대로 인정됐다.

“정당한 사법행정 업무, 직권남용 아니다” 다수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원행정처 근무 당시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대회를 견제하라는 지시에 항의하며 법원을 나온 뒤 국회의원이 됐다. 연합뉴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원행정처 근무 당시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대회를 견제하라는 지시에 항의하며 법원을 나온 뒤 국회의원이 됐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에 비해 ‘사법행정 업무의 특성을 감안해 무죄’란 취지의 결론을 다수 냈다. 그간 임 전 차장이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부분을 인정한 결론이다. 법률신문에 헌재소장을 비판하는 취지의 기사를 싣기 위해 대필한 기사를 건넸다는 혐의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직권남용”이라고 했지만 임 전 차장 재판부는 “허위 내용은 아니고, 기사 형식의 보도자료 제공은 대외업무 담당자가 정할 수 있는 부분이고 부당하지 않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강제징용 사건, 위안부 손해배상 사건 등에 관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검토시킨 데 대해서도 “임종헌이 담당하던 대 행정부, 대국회 업무에 비춰 필요성이 인정되고 재판 중립을 침해하지도 않아 직권남용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국회의원 보좌관 사건 검토 보고서 작성 지시, 정운호 게이트 수사 확대 저지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부분도 마찬가지로 무죄 판단을 내렸다.

두 재판부는 법원 내 가장 큰 반발을 샀던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관련 보고서·게시글 작성 지시 및 법관 100명 탈퇴 유도’, ‘이판사판 카페 보고서 작성 지시’ 등에 대해서도 다른 결론을 내렸다. 인권법연구회‧인사모 탈퇴 종용하는 취지의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것은 앞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항소심까지 유죄를 받은 부분인데,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직권남용”이라고 봤지만 임 전 차장 재판부는 “관련 예규에 따른 행동”이라며 무죄라고 봤다. 이판사판 카페 관련 보고서 작성도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유죄”, 임 전 차장 재판부는 “무죄”라고 했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가 ‘무죄’라고 봤지만 임 전 차장 재판부에서 유죄로 판단한 부분도 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에서 일방 당사자인 고용노동부의 재항고이유서를 사실상 대신 쓰도록 심의관에게 시킨 부분은 심의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켜 유죄가 인정된다고 봤다.

공보관실 운영비를 불법으로 편성 받고 사용했다는 혐의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기획재정부 공무원이 심사를 불충분하게 한 것”이라며 무죄라고 판단했지만, 임 전 차장 재판부는 “기재부 공무원과 국회의원을 속여 예산을 타냈고, 기재부 심사에서 밝힐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며 유죄라고 밝혔다. 예산 운영과 관련해 약 3억 3300만원 업무상 배임죄도 인정됐다.

‘이규진 유죄’ 부분도 임종헌은 일부 달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이 ‘메르스 이후 정부가 법적 책임을 질 부분이 있을지 검토하라’고 시킨 점, ‘국회의원들의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사건 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점에 대해 유죄를 받은 건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선 다루지 않았던 공소사실이다.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무죄를 확정받은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 지국장 명예훼손 재판개입’ 의혹과 관련해선 임종헌 전 차장도 같은 취지로 무죄를 받았다. 재판부는 “특정 재판 결과가 국민의 법감정과 맞지 않는다 해서 사법행정권에 ‘일선 법관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더 큰 가치인 법관의 독립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며 검찰의 직권남용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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