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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7년' 딛고 뉴삼성 시동…"AI시대 주도권 가져와야" [삼성의 과제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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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5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 리스크’는 털었다. 이제 오롯이 ‘사업 리스크’를 헤칠 시간이다.
5일 이재용 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총수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7년 넘게 이어진 사법 리스크는 ‘초격차 상실’이라는 사업 리스크로 전이되고 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시장의 법칙을 만드는 특권은 1등 애플·TSMC에 있을 뿐, 삼성은 주력 사업 모바일·반도체 모두에서 쫓거나 쫓기고 있다. 한국 대표주자 삼성전자가 허덕이니 국내 경제 전반이 숨차다. 이 회장의 ‘뉴삼성’이 지금 체질, 생태계, 인재 등 3대 과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1등 DNA’ 흔드는 ‘1등 의식’

“HBM 사례에서 충격적인 건, 삼성이 시제품 생산에서 늦어진 게 아니라 상품 기획 단계부터 처졌다는 거다.” 5일 삼성전자 전직 고위 임원은 격정을 토했다.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고수하지만, HBM(광대역폭메모리)으로 인공지능(AI) 혁명의 최전선에 선 건 SK하이닉스다. 엔비디아에 HBM3를 사실상 독점 공급 중인 SK하이닉스는 지난 4분기 1년 만에 흑자 전환했다. 삼성전자가 D램 지배력과 세계 1등에 안주해 AI 시장 대비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뒤처짐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삼성에 스며든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영업적자는 15조원에 육박하며, 파운드리(위탁생산) 1위인 TSMC와 시장 점유율 격차는 57.9%(TSMC) 대 12.4%(삼성)로 더 벌어졌다. 자체 칩을 설계하는 삼성이 파운드리까지 하니 수주에 불리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은 “중요한 건 분사 여부가 아니라 TSMC보다 나은 수율과 진실한 서비스”라고 말했다.

삼성은 2022년 6월 세계 최초로 3나노 양산을 시작했지만 지난해 파운드리에서 조 단위 적자를 냈다. 반면, TSMC는 애플의 까다로운 요구를 맞춰가며 3나노 칩 계약을 따내 지난해 하반기 실적 회복의 동력으로 삼았다. 인텔도 파운드리 사업을 본격화해, 수주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반도체 삼국지』의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소셜 계정에 올린 글에서 삼성전자에 “AI 반도체에 대해 갑의 위치를 다 잊고 철저히 을의 위치에서 다시 시작할 것”, “전-후 공정으로 나누던 시절 패키징을 소홀히 하던 습관을 버릴 것”을 주문했다.

‘남의 뇌’로 ‘남의 땅’에서 뛰는 한계

삼성전자의 새로운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S24는 AI 기능을 강조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의 새로운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S24는 AI 기능을 강조했다. 연합뉴스

남의 뇌를 달고, 남의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해 뛰는 주자. 삼성 스마트폰의 현 주소다. 지난 17일 삼성은 온디바이스 AI(네트워크 연결 없이 기기에서 바로 AI를 구동) 기능을 갖춘 갤럭시S24를 공개했다. 애플보다 먼저 AI 폰을 내놓은 것. 그러나 일부 내수용 모델을 제외하면 갤럭시S24의 두뇌(AP)는 퀄컴 칩을 썼고 상당수 AI 기능은 구글이 개발한 것이다. 삼성의 전직 고위 임원은 “재주 잘 넘는 곰은 이제 중국에 더 많다”며 “삼성이 이제는 다른 곰들을 굴릴 수 있는 서커스 판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생태계 주도권은 이익과 직결된다. 삼성은 스마트폰 AP를 퀄컴·미디어텍에서 사오는 데에 지난해 3분기까지 8조9900억원을 썼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 휴대폰 매출의 10.6%에 해당한다. 2019년엔 이 비율이 2.9%였는데, 의존도는 더 심해지고 있다. 지난달 퀄컴은 “삼성 갤럭시 최상급 모델에 퀄컴 칩을 쓰는 다년 계약을 연장해, 매우 만족스럽다”라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 LSI(시스템반도체) 출신 인사는 “삼성 내에서 엑시노스를 ‘돈 먹는 하마’로만 여기는 시각이 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삼성은 자체 AP인 엑시노스 개발팀을 지난 2019년 대폭 축소했다. 반면, 애플은 장기 투자해 자체 칩을 개발했고 아이폰·맥북에 100% 탑재하며 높은 마진율을 챙긴다. 생태계 경쟁은 AI 시대를 맞아 더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해 퀄컴은 자사 PC·모바일·자동차용 AI 칩을 탑재한 기기를 연결하는 ‘스냅드래곤 심리스’를 발표했다. 아이폰·맥북·아이패드를 연동하는 애플 생태계를 칩 제조사마저 모방하고 나선 것이다. 샤오미·아너·오포 같은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즉시 합류를 선언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물론 삼성도 2014년 미국 스타트업 인수 후 사물인터넷(IoT) 기반 스마트싱스 생태계를 키워왔다. 최근에도 자동차·에너지 등으로 스마트싱스를 확장 중이다. 그럼에도 녹스(보안)·삼성페이(결제)·빅스비(음성 비서) 등을 줄줄이 내놓던 2010년대 초중반의 행보에 비하면 소극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삼성은 파운드리·AP·모뎀(통신)칩·스마트폰을 모두 갖춘 거의 유일한 회사”라며 “소프트웨어를 빠르게 적용하고 개선할 수 있는 장점을 묵혀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퍼스트 무버’ 인재, 충분한가

이런 과제를 풀기 위한 리더십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 7년여 동안 삼성은 공격적 경영보다는 곳간을 지키는 ‘수성(守城)’ 중심으로 운영됐다. 매주 재판에 출석해야 했던 이 회장의 글로벌 보폭도 제한됐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삼성이 ‘기술 경영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 회장의 과감한 결단을 지원할 수 있는 기술 인재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경영=의사결정’인데 그간 삼성의 의사 결정 속도와 질은 아쉬웠다”며 “글로벌 인재를 찾아내고, 이들이 기능적 역할에 제한되지 않도록 오너가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팻 겔싱어 인텔 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로이터=연합뉴스

왼쪽부터 팻 겔싱어 인텔 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로이터=연합뉴스

삼성은 전 세계 시가총액 23위 기업으로 애플·TSMC·인텔 등과 경쟁하지만, 삼성을 대표하는 글로벌 톱 인재의 존재는 흐릿하다. 설립 25년 된 구글뿐 아니라 업력 55년 안팎으로 삼성전자와 비슷한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도 각각 순다르 피차이, 팻 겔싱어, 사티아 나델라 같은 일류 기술 경영인이 이끈다. 이들은 클라우드·AI 같은 시대 흐름을 읽고 과감히 투자해 회사가 ‘퀀텀 점프’ 수준으로 재도약하도록 했다.

주주총회 때마다 주주들이 ‘M&A’ 부재를 지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주요 기업들이 M&A 등을 통해 크게 성장할 동안 삼성은 중요한 투자 기회를 많이 놓쳤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도 인재의 중요성을 안다. 2016년 등기이사 선임 후 가장 먼저 삼성 연구‧개발(R&D) 조직인 삼성리서치를 출범하고 AI센터를 신설했다. 현재 전 세계 5개국에 위치한 AI연구센터는 그 결실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이제 삼성도 모방과 효율 같은 추격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고, 1등과 차이만 벌어질 뿐”이라며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능과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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