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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대를 뛰어 넘은 영웅들의 드라마|「플루타크 영웅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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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권의 고전을 골라 독자들에게 권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불후의 명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여러권의 고전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내세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잊을 수 없는 고전이라고 하면 성장과정에 따라 몇 권의 책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우선 내가 말과 글로 밥벌이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정다운 친구들에게 막된 사람이라고 욕먹지 않고 이나마 사람구실하며 살수 있도록 해준 책으로서는 단연 『삼국지』가 으뜸이었다. 배고프고 설움 받는 것이 싫어 검정고무신 신고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온 것은 내 나이 열다섯살 때,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의 「시구문」시장(지금의 한양공고 건너편)적선지대에서 연탄을 배달하고 계란을 팔던 소년이 곁길로 빠지고 세속에 물들 수 있는 수렁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한 간고함 속에서도 풍진에 섞이지 않고 그 아픔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꾸도록 길잡이 해준 것은『장자』였다. 아마도 이 험한 세상 살다가 내가 감옥을 가게 된다면 나는 이 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꿈 많던 대학시절에 도대체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물음의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루트비히(E Ludwig)의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이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인연도 기이하다. 공부해서 출세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고향과 절연하고 고학하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운명이 가까워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6년 만이었던가, 고향에 돌아가니 이웃집아저씨들은 『네 아버지는 굶어죽었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장례를 치르고 몇푼 남은 돈을 들고, 객지(?)에 가면 꼭 그렇듯이 서점에 들러 한권의 책을 기념으로 샀다. 그것이 루트비히의 『…나폴레옹』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나에게는 가슴 저며오는 회한과 아픔이 있다. 신문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책은 20여 년 전에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독자들이 구해볼 수도 없는 책을 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어 그만두었다.
그 후 내가 공부 길로 접어들어 「민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고뇌하게 만든 책은 독일의 지성 피히테(J G Fichte)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었다. 공자께서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조문도 석사가의)라고 말씀하셨듯이 나는 피히테의 저서에 필적할 만한 『조선민족에 고함』을 쓸 수 있다면 한 서생으로서 여한이 없다.
나의 청년시절은 신장이 l78㎝, 체중은 55㎏에 허리둘레가 머리둘레와 같을 정도로 허약했다. 나는 너무 일찍이 사신이 내 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며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어느 하루도 몸이 가뿐하고 상쾌한 적이 없었다. 그때 나에게 마음의 위로를 준 것은 로마의 집정관으로서 정적들의 모함에 빠져 유배지 파비아에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쓴 보에티우스(Boetius)의 『철학의 위안』이였다. 이 글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은 큰 위로를 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가정을 이루고 한 아비가 되었다. 쏙 뺀 듯이 나를 닮은 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 녀석에게서 나의 소년시절을 보았다. 나는 그에게 한권의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서점에 나가니 내가 찾던 책은 이미 절판되고 없었다. 나는 출판사를 찾아가 먼지 쌓인 서고에서 한질의 책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플루타크 영웅전』이었다.
나는 그 책을 아들에게 주면서 『네 애비가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이나마 사람 노릇하는 것은 이 책 덕분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 글에서 어느 책을 권할까 망설이던 끝에 종당에는 이 책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 자식에게 권하고 싶던 그 순수함과 간절함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에 그리스·로마·카르타고(이집트)·마케도니아(중동)에서 명멸한 영웅·재사·가인·현철·의인 57명(본래는 이보다 더 많았으나 필사본으로 전해오는 동안에 부분적으로 일실됐다)의 행적을 적은 이 전기문학은 우리가 흔히 지침 하듯이 「영웅전」은 아니다. 일생토록 야망 찬 삶을 산 시저, 재승박덕했던 키케로와 안토니우스, 절의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한 소카토·포키온·알키비아데스, 대인의 금도와 기국을 보여준 알렉산더 대왕, 원문은 망실되었지만 간간이 묻어 나오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그리고 포악함의 말로를 보여주는 독재자들의 모습은 비록2000년의 시차를 두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현실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애덤스미스·마르크스가 그토록 탐독했고,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벌하기 위해 지중해를 건너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패튼이 토브루크 전투 중에도 읽었고, 세계 출판사상 성서다음으로 많이 발행되고 읽힌 『플루타크 영웅전』은 그 자체가 바로 서양의 지혜였다. 필자인 플루타크는 이 책을 쓰고 나서 『후세를 위해 쓰다보니 나의 삶을 바로잡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책을 권하면서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반드시 완역본을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필자나 그렇듯이 한 편의 글을 쓰노라면 토씨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법인데 번역자가 임의로 첨삭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누구와 누구의 비교」가 2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 영웅전의 백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한국어만은 이 「비교」를 삭제하는 무지함을 저질렀다.
이제 입학·졸업 철이 되었다. 서울에서 소문난 호텔 요리 집에는 이 젊은이들의 축하를 위한 모임으로 빈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 만큼 살게 되었으니 소중한 내 자식에게 축하로 한턱내는 것이 흉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호텔 뷔페를 나서는 순간 그 소년·소녀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권하건대 그보다는 차라리 퇴근길에 서점을 들르시라. 『삼국지』든 『플루타크 영웅전』이 든 한권의 책을 자식에게 선물하며 장래를 축복해주는 것은 아름답다. 이 대목에 관해 선현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시에게 천금을 물려주는 것은 좋은 책 한 권을 물려주느니만 못하다』(귀자간금 부여유자일경)라고.【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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