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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떡방앗간 다녀오는 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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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호 31면

설 준비, 경기도 양주, 1974년 ⓒ김녕만

설 준비, 경기도 양주, 1974년 ⓒ김녕만

농촌에서 설날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첫날이면서 또한 서서히 한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지금이야 시도 때도 없이 1년 내내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지만 50년 전만 해도 농사일에 시와 때를 맞추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설날이 지나면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린다는 우수(雨水)가 찾아오고 꽝꽝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한다. 곧 밭을 갈아 씨 뿌릴 준비를 해야 한다. 따라서 설 명절에는 설빔을 갖춰 입고 배불리 먹으며 이웃과 윷놀이를 즐기는 호사를 누리고자 했을 법하다.

설을 앞두고 가장 바쁜 곳은 방앗간이었다. 가래떡이 가득 담긴 커다란 양은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며느리와 화로를 들고 따라가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명절 대목에는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니 차가운 바람 술술 들어오는 방앗간에서 순번을 기다리자면 한나절, 며느리 추울까 아예 화로를 들고나왔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양은 다라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곱은 손 녹이는데 요긴한 화로는 요즘의 핫팩인 셈이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방앗간에 가시는 날은 아이들에겐 가슴 설레는 신나는 날이었다. 집에서 기다리자면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서 방앗간으로 두세 번은 뛰어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사람들로 비좁은 방앗간에서 얼씬거리면 어머니의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다시 좀이 쑤셔서 또다시 방앗간으로 달려갔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어머니가 이고 온 다라이에서 하얀 천이 걷히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 그 증기를 얼굴에 쏘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금방 나온 말랑말랑한 떡도 맛이 있지만, 화로에 구워 먹는 쫄깃한 맛은 일품이었다. 겨우내 화로 옆을 맴돌며 보물찾기하듯 재를 뒤적거려 잘 구워진 밤이나 고구마를 꺼내 먹고 화로 위에 석쇠를 올려 요거조거 구워 먹던 재미를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 시절 설날을 떠올리면 화롯불처럼 가슴이 따뜻해진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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