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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 반도의 겨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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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일요일 오전 9시,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천장에 뭔가 떨어지는 듯 ‘쿵’ 소리가 나며 집이 ‘출렁’했다. 이번엔 좀 크네, 방 구석에 놓아둔 비상 배낭을 들고 현관으로 가 문을 살짝 열어둔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진원지 도쿄만(東京湾), 도쿄23구 진도4, 쓰나미 발생 없음’이라고 떠 있다. 진도4면 가구 등이 크게 흔들리는 정도지만, 연초 강진을 경험한 후라 긴장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보니 여느 일요일과 다를 바 없는 풍경. ‘지진 대국’ 일본이라 가능한, 어떤 평화다.

지난 15일 일본 이시카와현 와지마시에서 한 주민이 지진으로 무너진 가옥 사이를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5일 일본 이시카와현 와지마시에서 한 주민이 지진으로 무너진 가옥 사이를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세계에서 지진 대비가 가장 잘 된 나라임을 의심치 않지만, 새해 첫날 일어난 노토(能登) 반도 지진 관련 뉴스를 볼 때면 ‘일본 맞아?’ 놀라게 된다. 지진이 발생한 꼬박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피해지인 와지마(輪島), 스즈(珠洲) 등의 4만2400여 가구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비슷한 규모였던 2016년 구마모토(熊本) 대지진 때도 1주일 만에 90%의 수도관이 복구됐다는데 이번엔 느려도 너무 느리다. 28일 시점에 여전히 3300가구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한달째 피난소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1만5000여 명이다. ‘목욕을 제대로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요청이 쇄도하자 학교나 체육관 등에 욕탕을 마련해 ‘입욕 지원 프로그램’을 연다는 서글픈 뉴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알고 보니 노토 반도는 방재 강국 일본의 ‘사각지대’였다. 일본 전국 주택의 내진설계 비율은 80%를 넘지만, 이 지역엔 내진설계 기준을 통과한 집이 50% 미만이었다. 이런 가옥 4만3766채가 이번 지진으로 파괴됐다. 수도관의 내진 적합률도 10~30% 정도에 머물렀다. 원인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다. 일본 전체 고령화율은 29% 정도인데 스즈시의 65세 인구 비율은 50%를 넘고, 와지마시는 40%대 후반이다. 나이가 든 주민들은 지진을 걱정하면서도 물려줄 이 없는 집을 돈 들여 수리하길 꺼렸다. 역사상 초대형 지진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지역이라 ‘설마’하는 마음도 화를 키웠다.

노토 반도의 추운 겨울은 재해엔 완벽한 대비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일본도 이번 지진을 계기로 재해 사각지대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중앙일보 도쿄총국 사무실도 2월 초 도쿄도 소방국의 긴급 안전 점검이 예정돼 있다. 크고 작은 지진을 겪을 때마다 ‘이 규모의 지진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을 상상하게 된다. 노토 반도를 뒤흔든 지진이 한반도 해안에 쓰나미를 몰고 왔듯 위험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올 재해에 대한 대비는 언제 시작해도 이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