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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샌티스를 사물함에 가둔 트럼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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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사물함에 갇혀 괴롭힘당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하는 고등학교 신입생.’ 미 공화당 대선주자였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두고 뉴욕타임스(NYT)가 한 이야기다.

지난 1년여 동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를 ‘론 디샌티모니어스’라고 불렀다. 디샌티스 이름에 ‘독실한 척하다’라는 뜻의 ‘Sanctimonious’를 합친, 전형적인 트럼프식 말장난이었다.

2022년 말 디샌티스가 대선에 나설 조짐을 보이면서 트럼프의 공격이 시작됐다. 같은 공화당 출신인 것도, 플로리다가 홈그라운드인 것도 아무 소용 없었다.

2020 년 7월, 론 디샌티스 미국 플로리다 주지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AFP=연합뉴스]

2020 년 7월, 론 디샌티스 미국 플로리다 주지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AFP=연합뉴스]

수많은 청중 앞에서 2018년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 당시 디샌티스가 자신에게 무릎 꿇고 지지를 구걸했다고 주장했다. 높은 굽의 카우보이 부츠를 신었던 디샌티스를 흉내 낸다며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기도 했다.

급기야 아무 근거 없이 디샌티스가 평소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거나, 동성연애자, 심지어 소아성애자일지 모른다며 낄낄댔다.

그런데 디샌티스는 이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자신의 지지층이 워낙 트럼프와 겹쳤기 때문이다. ‘미국을 더 위대하게’라는 손팻말을 들고 치렀던 선거에서 트럼프 덕을 봤단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앞으로 공화당에서 뭐라도 하려면 그의 세례가 필요할 거란 계산도 했을 것이다. 결국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를 이틀 앞두고 중도사퇴하며 트럼프의 괴롭힘도 끝이 났다.

그러나 디샌티스가 이런 대우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물함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유, 2028년 공화당 차기 대선 주자로의 낙점은 미지수다. NYT는 지난 242일의 유세 기간 이어진 트럼프의 무자비한 모욕 퍼레이드 탓에 디샌티스의 명성은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당원과 후원자들에게서 이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봤다.

게다가 빈정이 많이 상한 트럼프는 자신의 차기 내각에서 디샌티스의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지 선언에 대한 대가로 “더는 디샌티모니어스라고 놀리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줄 뿐이었다.

한때 디샌티스의 지지율은 트럼프를 뛰어넘은 적도 있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트럼프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초기엔 언론 노출도 피했던 그의 태도를 현지 매체들은 실패 요인으로 분석한다.

일인자가 엇나가는데도 그 위세에 눌려, 자기 목소리도 못 내고 우물쭈물하며 사물함에 갇혀 있는 정치인들, 비단 미국에서만의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