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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누울 자리도 안 보고 발만 뻗는 감세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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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역대급 세수 펑크에도 총선 앞 감세책 양산

세제개혁 청사진은 없이 증시 부양만 노려

누더기 세제 고치고 중장기 재원 고민해야

지난해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빌린 돈(임시대출금 누적액)은 117조6000억원이다. 역대 최대 기록이다. 정부가 한은에 낸 이자만 1506억원에 달했다. 물론 한은은 정부의 은행이기도 하니 정부가 한은에 손을 내밀 순 있다. 일시적인 자금 부족으로 급전이 필요한 개인이 마이너스 통장(마통)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너무 많이 갖다 썼다.

급전대출인 ‘마통’을 자주 쓰는 건 정부 곳간 사정이 좋지 않아서다. 지난해 1~11월 세수가 전년보다 49조4000억원이나 줄었다. 연간 50조원이 넘는 세수 펑크가 날 것 같다. 올해 관리재정수지는 91조6000억원의 적자가 예고됐다. 이미 나랏빚은 1100조원을 넘어섰고 올해 말이면 1200조원에 육박한다. 건전 재정 기조를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로선 도대체 면이 서지 않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정부가 감세를 중심으로 증시 부양용 정책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1400만 개미투자자의 표심을 노린 총선용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공매도 금지와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상향에 이어 올해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를 폐지하고 증권거래세 인하는 예정대로 이어가며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 혜택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증시 저평가를 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 금투세와 함께 과도한 상속세를 거론했다.

상속세가 대통령의 표현대로 “과도한 할증과세”라는 점은 일리가 있다. 현행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50%)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5%보다 한참 웃돈다. 여기에 대주주 할증까지 적용하면 60%에 달한다. 주가가 오르면 상속세를 많이 내야 하기 때문에 상속을 앞둔 기업들이 주가관리에 소극적이거나 일부러 주가를 낮게 유지하려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합리적인 공론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문제는 국가 재정 전체를 아우르는 청사진을 만들고 추진해야 할 세제 개편안이 증시 부양을 목적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속세가 증시에 부담을 주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이유라고 확대해석하는 건 지나치다. 한국 기업의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인색한 배당 문화,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 등 한국 증시 저평가의 근본 원인을 애써 외면하니까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조세 제도는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 이후 큰 개혁 없이 부분 개편만 거듭해왔다. 그러다 보니 복잡하고 알기 힘든 누더기 세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오죽하면 양도세 계산이 하도 복잡해 ‘양포세(양도세를 포기한 세무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겠나. 세제를 알기 쉽게 단순화하고,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고려해 새로운 세원을 개발하는 등의 중장기 과제를 제쳐두고 개인투자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감세 일변도 정책을 펴는 건 문제가 있다.

이미 발표한 감세 정책으로 인한 세수 감소 규모는 연간 수조원대에 달한다. 국회예산정책처의 2022년 추산에 따르면 금투세 폐지와 증권거래세 인하로 줄어드는 세수가 내년 한 해에만 3조4000억원이다. ISA 세제 혜택 확대에 따른 세수 감소도 연간 2000억~3000억원 수준이다. 누울 자리도 보지 않고 정부가 발을 뻗고 있다.

재정을 마음껏 쓰면서 나랏빚을 5년간 400조원이나 늘렸던 문재인 정부는 재정 중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반작용으로 건전재정 기조를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다. 그런데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국민이 지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