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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신이냐"…집에 안 간다는 취객, 결국 응급실로 보냈다

중앙일보

입력

“만취한 남성이 경춘선 숲길 공원 벤치에서 자고 있어요.”
체감온도가 영하 5도까지 내려간 17일 오전 0시 14분, 서울 노원경찰서 화랑지구대에 주취자 신고가 접수됐다. 주취자 민원을 해결하고 막 복귀한 윤철호 화랑지구대 3팀장은 숨 고를 새도 없이 경찰차에 올라탔다. 5분도 안돼 신고 장소로 도착한 윤 팀장은 벤치에 누워 있는 20대 남성 A씨를 발견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A씨를 지구대원 2명이 부축해 이동했다. A씨가 구토를 하자 지구대원 2명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상황은 이들이 A씨가 사는 인근 아파트를 찾아 가족에게 인계하고 나서야 종료됐다. 윤 팀장은 “조금 번거로울 순 있어도 가족한테 확실히 인계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1인 가구원은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도 나중에 문제가 발생할까 봐 걱정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17일 오전 0시 20분쯤 서울 노원구 경춘선 숲길 공원에서 발견된 주취자 A씨가 경찰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고 있다. 수 차례 속을 게워낸 A씨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이영근 기자

17일 오전 0시 20분쯤 서울 노원구 경춘선 숲길 공원에서 발견된 주취자 A씨가 경찰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고 있다. 수 차례 속을 게워낸 A씨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이영근 기자

실제 지난해 11월 서울북부지법은 서울 강북경찰서 미아지구대 소속 B경사와 C경장에게 각각 벌금 500만원과 400만원의 약식명령을 선고했다. 이들은 2022년 11월 30일 새벽 술에 취해 길가에 누워있던 60대 남성을 자택 야외 계단에 앉혀 놓고 돌아가 저체온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됐다. 법원의 약식명령 이후 두 경찰관은 경징계 처분(감봉 및 견책)도 받았다.

박인환 경찰제도발전위원장이 지난해 7월 서울 마포구 정신응급함동대응센터를 방문해 정신질환자·주취자 보호조치 관련 현장근무자들의 현장 의견을 청취하기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박인환 경찰제도발전위원장이 지난해 7월 서울 마포구 정신응급함동대응센터를 방문해 정신질환자·주취자 보호조치 관련 현장근무자들의 현장 의견을 청취하기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경찰 내부에선 주취자 보호책임 관련 논란이 가열됐다. 주취자를 보호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데, 일선 경찰관에게 지나친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대 경험이 많은 한 경찰관(경감)은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지 않은데 혼자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주취자가 적지 않다. 이들을 강제로 제압해서 동행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서울의 한 파출소 팀장은 “집 주소 등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주취자를 만나면 휴대전화 비밀번호라도 알아내라는 건가 싶다”며 “경찰이 신이 아닌데 신이길 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 경찰의 과실이 적지 않아 징계가 불가피했다는 의견도 나왔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실무적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국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경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일선서의 한 파출소장도 “주취자를 데려다줄 때 이미 지친 상태였겠지만 잘못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주취자 사망 사고가 잇따르자 경찰은 지난해 5월 ‘주취자 보호조치 매뉴얼’을 손질했다. ‘의식 있는 주취자’라도 정상적 판단 능력이 없다면 병원 응급실로 보내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주취자 D씨가 지난 17일 오전 1시 20분쯤 남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어깨를 이빨로 깨무는 등 폭력행위를 벌였다. D씨는 경찰에 제지 당한 이후 바닥에 주저 앉아 오열했다. 이찬규 기자

주취자 D씨가 지난 17일 오전 1시 20분쯤 남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어깨를 이빨로 깨무는 등 폭력행위를 벌였다. D씨는 경찰에 제지 당한 이후 바닥에 주저 앉아 오열했다. 이찬규 기자

그러나 이 역시 또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의료계에서 경찰이 주취자 보호책임을 가뜩이나 포화 상태인 응급의료계에 전가한다고 우려하는 탓이다. 현재 전국에 총 22곳(서울 4곳)에서 주취자 응급센터를 운영 중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경찰이 의료적 판단 없이 주취 여부만 고려해 이송하면 응급의료 종사자들의 업무 부담이 가중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응급센터에서 주취자 입원이 거부 당한 사례도 있다. 서울 강동경찰서 길동지구대는 지난 16일 팔에 자해 흔적이 있고 얼굴이 창백했던 30대 여성 주취자 D씨를 주취응급센터로 옮기기로 했지만, 인근 주취자 응급치료센터가 D씨의 입원을 거부했다. 이에 경찰은 D씨 발견 2시간 40여분이 지난 뒤에야 국립중앙의료원 주취응급센터로 이송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경찰·소방·지자체·병원 등 유관기관이 주취자 보호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국회에는 이를 골자로 하는 주취자 보호법 4건이 소관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 지난해 4월 부산경찰청은 부산시, 부산의료원 등과 논의를 거쳐 조례를 개정해 ‘주취해소센터’를 열었다. 환자가 아닌 ‘비응급 주취자’를 보호하기 위한 전국 최초·유일한 주취자 공공구호시설이다. 주취해소센터는 간호사나 응급구조사 자격이 있는 구급대원이 1차로 환자를 본 뒤 치료가 필요할 때만 응급실로 보낸다. 경찰관과 소방이 3교대로 근무를 선다. 지난해 12월까지 모두 389명을 보호조치했다.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처음엔 지자체와 의료계도 난색을 보였지만 함께 지역 안전을 지키자는 거듭된 설득에 결국 모두가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17일 오전 0시 4분쯤 을지로3가역 근처 도로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상태로 발견된 30대 여성이 국립중앙의료원 주취자 응급치료센터로 잠든 채 이송됐다. 이찬규 기자

17일 오전 0시 4분쯤 을지로3가역 근처 도로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상태로 발견된 30대 여성이 국립중앙의료원 주취자 응급치료센터로 잠든 채 이송됐다. 이찬규 기자

해외에선 보호시설 설치 의무화 등을 통해 주취자에 대한 경찰 부담을 줄인다. 영국은 경찰뿐만 아니라 소방과 응급구조대도 주취자 보호조치의 주체가 된다. 국가보건서비스에서 운용하는 이동식 주취자 보호소나 간이 주취자해소센터로 주취자를 이송해 의료시설의 과부하를 방지한다. 호주 경찰은 주취자를 국가와 지자체 등에서 운영하는 공인보호시설로 이송한다. 공인보호시설 관리자나 보호인은 주취자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면책조항을 둔다. 조민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보는 “경찰 인력과 의학 전문성만으로 주취자를 보호할 수 없다. 주취자 보호의 목적은 결국 치료와 직결되기 때문에 소방과 의료진의 역할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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