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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프로야구, 시간 끌지 “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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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호 30면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32년 동안 우승은 없지만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창의적인 응원문화는 챔피언 급이다. 내가 1980년대 후반 사직구장에서 경험한 건 ‘라이터 응원’이다. 야간경기 때 리더의 구호에 맞춰 관중이 일제히 라이터를 “촥” “촥” 켠다. 수천 개의 불꽃이 켜졌다 꺼지는 모습은 장관이다. 물론 경기장 내 흡연이 가능했던 시절 이야기고, 화재와 사고 위험 때문에 중단되긴 했다. ‘휴대폰 불빛 응원’의 원조 격이 아닐까.

다음은 ‘신문지 응원’이다. 깔고 앉아 있던 신문지를 잘게 찢은 뒤 구호나 노래에 맞춰 위아래로 흔든다. 단순하지만 상당히 스펙터클한 장면이다.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응원 도구로 활용한다’는 실용정신이 돋보인다. ‘봉다리 응원’도 있다. 주황색 쓰레기봉투에 바람을 넣어 머리 위에 뒤집어쓴다. 사직구장 관중석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키득거린다.

시간단축 ‘피치 클락’ 도입 저울질
‘분초사회’ 살아남으려면 결단해야

롯데의 최장수 응원 아이템은 2003년 등장해 22년 전통을 자랑하는 “마!”다.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면 롯데 팬들은 목청껏 “마!”를 외친다. ‘하지 마’와 ‘임마’의 중의적 의미인데 원정팀 투수는 상당한 위압감을 느낀다고 한다. “쫌”(창원 NC) “떽”(서울 LG)처럼 팀마다 ‘견제 응원’이 있지만 중량감은 “마!”에 미치지 못한다.

견제구를 던지는 건 1루 주자를 묶어놓음과 동시에 타자의 타격 리듬을 끊으려는 의도다. 견제가 반복되면 경기는 늘어질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KIA 타이거즈의 견제 응원이 “아야~, 아야~, 아야~, 날 새것다”일까.

어쩌면 올해 안에 “마!”를 포함한 견제 응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경기시간 단축을 위해 ABS(자동볼판정시스템)와 함께 메이저리그(MLB)에서 운영 중인 ‘피치 클락’을 도입하기로 해서다. ABS는 로봇이 볼-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것이고, 피치 클락은 투수가 정해진 시간 안에 투구해야 하는 규정이다. MLB는 ‘주자 없을 때 15초, 있을 땐 20초 이내’에 투구하도록 했고 이를 어기면 페널티로 ‘볼’ 하나를 부과한다. 주자 당 견제는 2회로 제한했다. 세 번째 견제에도 살아난 1루 주자는 자동으로 2루에 간다. 사실상 견제구를 던지지 말라는 뜻이다.

MLB 사무국은 경기 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풋볼(NFL)·농구(NBA)에 밀린 인기를 만회할 수 없다고 판단해 피치 클락이라는 초강수를 썼다. 효과는 즉시 나왔다. 지난해보다 경기 시간이 26분이나 줄어 2시간40분으로 떨어졌다. 경기당 평균 관중이 5% 늘었고, 시청자 수도 급증했다. 젊은 층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KBO리그의 평균 경기시간은 3시간10분대다. KBO는 지난 11일 “ABS는 올 시즌부터 실시하고, 피치 클락은 전반기 시범 운용을 해본 뒤 후반기부터 적용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시범 운용’이 무슨 뜻인지 KBO에 물었더니 “시계로 계측과 공개는 하되 페널티는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견제구에 대해서는 “허용 개수를 두 개로 할지, 페널티를 어떻게 할지 등은 더 연구해 보겠다”는 답을 내놨다. ‘ABS와 피치 클락을 동시에 시행하면 실전에서 큰 혼란이 올 수 있다’는 프로야구 종사자들의 목소리 때문에 반 발짝 물러선 느낌이다.

매년 다음해 소비 트렌드를 예측해 키워드를 발표하는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2024년 소비시장은 고객의 시간을 둔 쟁탈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분초사회’를 10대 키워드 맨 위에 올렸다. 돈보다 시간을 중요시하고 ‘가성비’보다 ‘시성비’를 따진다는 거다.

‘시간을 끄는 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KBO도 경기시간 단축을 위한 피치 클락 도입에 시간을 끌면 안 된다. KBO가 주춤댄다면 지난 연말 재선에 성공한 허구연 총재를 향해 “마!” “쫌” “떽” 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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