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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준봉의 시시각각

학문의 기초 위협하는 번역 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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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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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한 30대 중반의 신진 연구자 배세진씨는 지난 1일 자 교수신문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번역서 없이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자를 양성할 수 없다'.
 배씨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 전부터 취득 후 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이례적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 번역에 매진해 왔다고 했다. 학자나 연구자보다 번역자로 더 알려졌을 정도다. 창조적 에너지가 가장 왕성한 시기에 자기 글이 아닌 남의 글 번역에 더 열심이라는 동료 연구자들의 눈총까지 감수해 가면서다. 텍스트 장악을 입증할 수 있고 결국 내 글쓰기에 도움이 되리라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가슴을 졸일 정도로 함량 미달을 걱정하게 된 탓도 있다고 썼다. 그만큼 부실한 번역이 많다는 얘기다. 온전한 번역서 없이 학문 연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런데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한다는 것이다.

정치철학 연구자 배세진씨의 기고가 실린 교수신문 인터넷 홈페이지.

정치철학 연구자 배세진씨의 기고가 실린 교수신문 인터넷 홈페이지.

 이 글을 두고 한 출판인이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결국 40년 전 도올의 문제 제기로 되돌아가는 느낌인데…."
 도올은 물론 철학자 김용옥이다. 40년 전 그의 문제 제기는 1985년 책 『동양학 어떻게 한 것인가』에 나오는 번역 관련 논의를 말한다. "번역을 토대로 하지 않은 모든 지적 활동은 공중누각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관계된 고전의 번역이 없이는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축적되어 가지 아니한다…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는 우리나라 학계에 고질화되어 있는 번역 경시의 통념을 광정(匡正)하자는 데 초점이 있다." 40년이 지났어도 번역 홀대에 관한 한 국내 학계는 바뀐 게 없다는 얘기다.
 학계에 따르면 번역 홀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됐다. 대학교수 자리가 철밥통이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대학가에 교수평가제가 도입됐다. 과학논문인용색인(SCI) 등에 포함되는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경우 교수 임용·승진 등에서 가산점을 줬다. 두뇌한국(BK)·인문한국(HK) 같은 정부의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에 인문학이 포함되면서 인문학 분야도 연구실적을 깐깐하게 따졌다. 그 방법은 정량평가다. 논문의 품질보다 몇 편을 발표했느냐, 양이 우선이다. 번역 함량이나 번역 대상 원서의 학문적 중요성을 따져 교수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는, 번역에 열심인 교수들의 주장은 먹히기 어려운 구조다. 수량 확인에 비해 우열 판정은 시비가 일 공산이 크지 않나.

40년 전 도올이 비판했던 번역 경시
지금도 교수임용 때 업적 인정 인색
정량 방식 치우친 교수 평가의 그늘

 그렇다고 학계가 꿈쩍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가령 국공립대는 사정이 좀 낫다고 한다. 과거에 비하면 번역 실적을 더 쳐준다. 한 사립대의 일부 학과는 교수 임용 때는 반영하지 않지만 임용 후 평가 때는 번역 실적을 반영해 준다. 학교에 따라, 같은 학교 안에서도 과에 따라 사정이 제각각인 상황이다.
 정작 번역 홀대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번역 홀대로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 자체가 사라졌다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수십 년간 반복 노출되다 보니 많은 사람이 번역 홀대 주장에 무감각해졌다. 번역작업에 대한 학문적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일부 뜻있는 교수들이 '반드시 번역돼야 한다'고 믿는 텍스트들을 '재능 기부'식으로 번역하는 실정이다. 배세진씨처럼 말이다.
 한국외대 정은귀 교수는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의 시집 열세 권 전권을 지난해 말 완역, 출간했다. 가르치고 논문 쓰며 번역하기 위해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 다섯 시간씩 번역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돈으로 따지면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번역 홀대를 어찌해야 할까. 지금처럼 학계나 시장에 맡겨둬야 할까. 서강대 이덕환 명예교수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교수 임용이나 평가를 현재의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로 가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적극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