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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전국민 독성시험" 1심 무죄→2심 전부 유죄 뒤집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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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지난 2019년 구속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컬 대표가 항소심에서 금고 4년형을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았던 1심을 뒤집은 결론이다. 사진은 2019년 구속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한 홍 전 대표. 뉴스1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지난 2019년 구속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컬 대표가 항소심에서 금고 4년형을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았던 1심을 뒤집은 결론이다. 사진은 2019년 구속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한 홍 전 대표. 뉴스1

“이 판결은 ‘만일 그때로 다시 돌아갔더라도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서승렬 부장판사)

1심에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모두 무죄 판단을 받았던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 사건이 3년에 걸친 항소심 끝에 유죄로 뒤집혔다.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부장판사 서승렬)는 11일 “어떠한 안전성 검사도 하지 않은 채 상품화 결정을 내려 업무상 과실이 모두 인정된다”며 제조·판매사 임직원 13명 전원을 유죄로 인정하고, 금고형 및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2019년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한순종 전 본부장,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금고 4년형, 나머지 임직원 8명에겐 금고 3년 6개월~2년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금고형은 교도소에 수감하지만 노역을 하지 않는 형이다. 다만 이들을 법정구속하진 않았다. 외부 제조업체 임직원 2명은 금고형의 집행유예를 받았다.

재판부는 이날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불특정 다수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 피해자는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보는 등 존엄성을 침해당했다”고 지적했다.

1심 무죄에 “잘못된 판결” 학계 반발, 연구자료 내기도

SK케미칼·애경산업이 제조, 판매한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 연합뉴스

SK케미칼·애경산업이 제조, 판매한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 연합뉴스

이들은 2002년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 출시 전 유해성 실험 결과를 보고 위험을 알면서도 제품을 제조‧판매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2021년 1월 1심 재판부는 “옥시(상품명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의 주성분 PHMG와 달리 가습기메이트의 주성분인 CMIT‧MIT는 일부 독성 실험 결과는 인정되지만 폐질환‧천식을 유발‧악화시켰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기엔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대법원은 2018년 옥시에 대해선 유해성을 인정하고 제조사인 옥시레킷벤키저 신현우 전 대표에게 같은 혐의로 징역 6년을 확정한 바 있다.

이런 1심 판결 뒤 이례적으로 독성학·역학·의학계가 “전문가의 연구결과를 틀리게 인용한 잘못된 판단”이라며 공개 반발했다. 이후 항소심에선 추가로 발표된 연구결과들도 다수 제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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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우려 제기에도 무시, 그게 이어져 이 사건 됐다”

항소심에서 금고 4년형을 받은 안용찬 애경산업 전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2심 선고를 마친 뒤 법정을 나서는 도중 가습기 살균제 피해 관계자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항소심에서 금고 4년형을 받은 안용찬 애경산업 전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2심 선고를 마친 뒤 법정을 나서는 도중 가습기 살균제 피해 관계자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그 결과 항소심 재판부는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의 유해성으로 인한 상해 및 폐질환·천식 발생과의 인과관계를 대부분 인정했다. 전신인 유공 가습기메이트 1994년 출시 당시부터 독성을 우려하고도, 실험 결과 없이 출시하고 회수도 하지 않은 점도 짚었다. 재판부는 “당시 유공은 ‘더 실험이 필요하다’는 서울대 수의대의 결과를 무시하고 계속 판매했고 회수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이어져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에서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하는 결과에 이르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의문은 2002년 가습기메이트, 2006년 이마트 가습기살균제 출시 결정 과정에서도 제기될 수 있었고, 제기됐어야 했다”며 “그러나 피고인들은 질문을 하지 않거나 회피했고, 어떤 검사도 하지 않은 채 상품화를 결정해 업무상과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사이 서울대 실험보고서가 건네졌는데도 그걸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라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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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배척한 연구결과도 2심 유죄 근거로 모두 인정

항소심은 1심이 ‘편향된 연구’라며 모두 배척했던 연구결과들도 “과학적 검증기법으로 진행됐고 국내외 동료전문가집단이 승인한 결과로, 편향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인정했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함으로써 ▶CMIT/MIT 성분이 폐 깊숙이 도달하는지 ▶그로 인해 독성이 나타날 개연성 ▶호흡기 피해를 줄 만큼 충분한 양인지 등에 관한 실험 결과를 무죄 근거로 삼았던 1심과 달리 항소심은 이를 유죄의 근거로 인정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11일 항소심 선고 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11일 항소심 선고 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들은 “원래도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뒤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보상 공지 이후 피해 신고가 증가했다” “출시 전 실험을 했더라도 유해성은 확인하지 못했을 것” 등의 주장을 폈지만, 항소심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 발생이 의심돼 제조·판매를 중지·수거했다면 과실이 부정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며 “만약 건강상 피해와 인과관계를 부정한다면 종(種)간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동물실험의 한계로, 피해자 보호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게 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엄격하게 인과관계를 따진 종전 대법원 판례와 다른 판결이다. 재판부도 이를 언급하며 “필요한 조치를 했더라도 결과 발생을 피할 수 없었을 경우 인과관계를 부정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밀을 이유로 회사와 소비자 간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유통시장에서, 제조·판매업자에게 요구되는 안전성 주의의무 위반 사안까지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 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지원 대상 피해자는 5691명에 달한다. 이 중 사망자도 1262명이다. 이날 선고 직후 “1000여명이 죽었는데 고작 4년이냐”며 반발한 피해자도 있었다.

SK케미칼 측은 이날 선고에 대해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고, 법적 절차와 별개로 피해자들의 고충을 덜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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