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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트리맨”…히라코의 자연 동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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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유이치 히라코의 초대형 회화 '여행'(2023). 가로 10m, 세로 3m에 달한다. [스페이스 K]

유이치 히라코의 초대형 회화 '여행'(2023). 가로 10m, 세로 3m에 달한다. [스페이스 K]

언뜻 보면 그림 동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나무 얼굴을 한 3m 높이의 사람, 엄청난 크기의 형형색색 과일들, 바위 크기의 도토리···. 현실과는 거리가 먼 기묘한 숲속 풍경이 회화, 조각, 설치 작품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 작가 유이치 히라코 (41)의 개인전 ‘여행(Journey)’(2월 4일까지) 현장이다.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먼저 소문난 걸까. 자녀들 손을 잡고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이 적잖다. 작가는 전시장 입구에 자신이 나무로 직접 제작한 핀볼 머신을 설치했다. 또 작품에 등장하는 동·식물과 캐릭터를 오브제로 만들어 곳곳에 배치했다.

윺이치 히라코, ‘Green Master 83’(2023). [스페이스K]

윺이치 히라코, ‘Green Master 83’(2023). [스페이스K]

유이치 히라코, 'LOST IN THOUGHT 65'.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유이치 히라코, 'LOST IN THOUGHT 65'.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아직도 미술을 가까이 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간격이 꽤 큰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미술이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여기잖아요. 이곳에선 미술을 놀이처럼 더 편하게 접하고 즐기면 좋겠습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히라코의 설명이다.

일본 오카야마 출신의 히라코는 그림과 조각·설치를 넘나들며 동식물이 함께하는 풍경을 담아온 작업으로 최근 몇 년 동안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왔다. 2021년 서울 바톤갤러리, 2022년 11월 상하이 파워롱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작가는 동화 같은 풍경 속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 관점 등의 이야기를 녹여냈다. 캔버스 안에 꿈틀거리는 붓 터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그려낸 풀과 꽃과 씨앗들, 숲속 풍경도 매력적인 요소로 꼽힌다.

유이치 히라코 개인전 '여행' 전시장 전경. [스페이스K]

유이치 히라코 개인전 '여행' 전시장 전경. [스페이스K]

유이치 히라코 작가. [스페이스K]

유이치 히라코 작가. [스페이스K]

자연을 핵심 주제로 다루게 된 계기는.
“런던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사람마다 자연을 보는 관점이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리젠트 파크에 갔는데 친구가 ‘역시 자연이 좋구나!’ 감탄하더라. 공원이 ‘자연’이라고? 저는 공원이 ‘인공의 자연’ 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적잖이 놀랐다. 그때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는 항상 자연과 함께 해왔지만 각자 다른 관점으로 모호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지금 우리가 각자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우리 주변의 자연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물으며 15년째 작업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엔 그가 생각하는 자연이 표현돼 있다. 작품에 반복해 등장하는 캐릭터, 일명 ‘트리맨(Tree Man)’이 그 대표다.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일본 민속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는데, 사람과 나무를 결합한 그 나무 머리마저도 잘 보면 동물(뿔 모양)과 식물(나무)의 혼종 형태다. 인간과 동·식물을 위계 없이 ‘하나’로 보는 시각이 엿보인다, 그에 따르면 “이 혼종의 인물이 내 자화상이자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의 초상”이다.

작품 속에서 트리맨은 강아지, 고양이 그리고 여러 식물과 여행을 떠난다. 그 여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이 가로 10m, 세로 3m의 초대형 회화 ‘여행’(2023)이다. 각각 다른 장면이 그려진 4개의 작품이 붙어있는 이 그림은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고, 거기서 나온 씨앗들을 새가 다시 어딘가로 가져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트리맨을 주인공으로 한 초상화 형식의 회화 ‘그린 마스터(Green Master·2023)’도 흥미롭다.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뒤편은 식물 화분이 가득한 상황을 묘사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구획을 나누고 국경을 만드는 인간과 달리 식물은 새나 바람의 도움으로, 혹은 타의에 의해 경계를 넘어 종을 번식하고 군락을 이룬다”며 “열매와 씨앗으로 종을 번식하는 식물의 자유로운 여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대한 나무·열매 조각도 선보였다. 회화와 조각을 병행하는 이유는.
“이 시리즈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림만 그렸는데, 회화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입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입체의 강점은 역시 3차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작고 귀여운 조각과 달리 큰 조각은 친근한 것만은 아니다. 압도적인 크기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요소도 있다”며 “거대한 열매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개입해 품종 개량해 만든 ‘미래형 열매’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묻는 의미도 담았다”고 덧붙였다. 비밀을 간직한 듯한 히라코의 자연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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