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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어르신도 줄섰다…'대치동 맘' 울린 33년 분식점 마지막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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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 커서 분가한 딸들이 마지막으로 추억의 맛을 꼭 봐야겠다고 해서요. 이 나이에 심부름을 왔지요. 애들이 중·고등학생일 때부터 다녔던 분식점이에요.

지난 4일 오전 9시 40분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종합상가의 '만나분식' 앞에서 줄을 서 있던 유모(72)씨가 웃으며 말했다. 앞서 만나분식은 이날 10시 30분에 개점한다고 공지했지만, 유씨를 포함해 5명은 1시간 전부터 문 열기만 기다렸다. 10분 만에 줄을 선 손님은 30명으로 늘었다. 33년여간 은마상가를 지킨 만나분식이 7일 마지막 영업을 끝으로 폐점한다는 소식을 듣고 단골들이 몰린 것이다.

결국 오전 10시쯤 사장 박갑수(67)씨가 첫 손님을 맞았다. 가게 안 좌석 25개가 꽉 차고 11명이 밖에서 기다렸다. 직원이 "떡꼬치 먹을 사람 손 드세요!"라고 외치자 손님 7명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떡꼬치는 만나분식의 인기 메뉴 중 하나다. 떡꼬치라고 부르지만 꼬치 없이 두툼한 떡을 튀겨 접시에 담은 뒤 양념을 올려준다. 말간 국물의 달큰 매콤한 떡볶이와 뻥튀기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끼운 뻥튀기 아이스크림도 손님들이 많이 찾는 메뉴다.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종합상가 만나분식을 찾은 손님의 모습. 가게 한 쪽에 '2024년 1월 8일부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박종서 기자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종합상가 만나분식을 찾은 손님의 모습. 가게 한 쪽에 '2024년 1월 8일부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박종서 기자

1990년 무렵부터 만나분식을 운영한 박씨와 부인 맹예순(62)씨는 최근 건강이 나빠져 장사를 접기로 결심했다. 맹씨는 "3박 4일 여름휴가와 추석·설 하루씩을 빼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장사를 하면서 건강이 많이 망가졌다"고 했다. 맹씨의 팔엔 지난 시간을 증명하듯 화상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다.

10시 40분쯤 되자 대기 손님은 약 70명으로 불었다. 줄은 옆 가게까지 이어졌다. 손님의 연령대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온 40대 여성 김모씨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추억이 담긴 고향 같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오후 한 시간을 기다려 떡볶이를 먹고 나왔다는 방모(42)씨도 "중고등학생 때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날이면 무조건 만나분식에서 라볶이를 먹었다"며 "사장님 두 분이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부부는 당초 지난해 말 가게를 닫으려고 했지만, 손님들의 요청에 일주일 정도 영업을 연장했다. 이후 가게 앞은 추억의 맛을 마지막으로 보러 온 손님들로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맹씨는 "전날에도 오후 9시까지 음식을 팔고 오늘 영업 준비까지 마치니, 겨우 1시간 남짓 눈을 붙일 수 있었다"며 "힘들어도 마지막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떡볶이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4일 만나분식 앞에는 마지막으로 추억의 맛을 보려는 단골이 몰렸다. 박종서 기자

4일 만나분식 앞에는 마지막으로 추억의 맛을 보려는 단골이 몰렸다. 박종서 기자

30여 년 전 맹씨는 남편 건강이 나빠지자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만나분식을 열었다. 맹씨는 "빚만 쌓이고 라면 하나 못 살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져 시작했던 가게"라고 말했다. 인근에 대치동 학원가가 형성되면서, 만나분식은 학원 수업 사이에 학생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좋은 재료를 쓰고 맛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은마아파트 주민 뿐 아니라 이른바 '대치동 맘' 사이에서도 유명해졌다. 맹씨는 "100% 국산 고춧가루를 쓰고 양심껏 순수한 마음으로 장사했다"고 말했다.

부부에게는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 기억에 남는 손님도 셀 수 없이 많다. 교복을 입고 가게를 찾았던 손님이 의사·변호사·사업가가 돼 돌아왔다. 얼마 전엔 해외에 나가는데 떡볶이 양념을 가져가고 싶다며 사가거나, 폐점 소식에 아쉬워 맹씨를 끌어안고 눈물을 보인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맹씨 부부는 당분간 미뤄뒀던 병원 치료를 받을 계획이다. 맹씨는 "이젠 다 큰 자식들이 '쉬면서 여행도 다니고 건강 챙기라'고 하더라"며 "평생 일을 해서 정말 쉴 수 있을진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부는 "그동안 찾아와 준 모든 손님에게 감사하다고, 다시 볼 수 없어 저희도 아쉽다고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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