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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육성 신년사 5년째 생략한 김정은 ‘속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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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호홍 가천대 겸임교수·한국국가전략연구원·대북전략센터장

김호홍 가천대 겸임교수·한국국가전략연구원·대북전략센터장

2020년부터 4년 연속으로 신년사를 생략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도 1월 1일 아침에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말에 개최한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결론 발표로 대체했다. 국가 지도자의 신년사는 지난 1년의 국정 성과를 설명하고 새해 비전을 제시하는 중요한 정치 이벤트다. 1년을 결산하면서 돌아볼 것과 새해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을 텐데 5년째 신년사를 ‘패싱’했다.

김정일은 중국공산당을 모방해 당보(노동신문)·군보(조선인민군)·청년보(청년전위) 공동사설로 대체했을 뿐 육성 신년사는 한 번도 없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후 세습 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은은 2012년의 경우 전례에 따라 공동사설로 대체했지만, 2013년부터 육성 신년사로 변화를 시도했다.

1994년 김일성의 생전 마지막 신년사 이후 지도자의 육성 신년사는 무려 19년 만이었다. 검은색 인민복에 노동당 제1비서 자격으로 행한 첫 신년사에서 김정은은 “주체 혁명 위업 완수”를 선언하고, “강성국가 건설을 위한 장엄한 진군에 떨쳐나서자”며 호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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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9년을 끝으로 신년사가 자취를 감추고 2020년부터 당 전원회의 결론 보도로 대체했다. 이런 변화는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과 행적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자화자찬과 장밋빛 전망을 담은 말의 성찬으로 주목받기를 즐기는 그는 자신을 인류평화와 민족통일을 고민하는 지도자, 인민의 삶을 챙기는 영도자로 포장하고 선전할 법한데 그러지 않는다. 신년사 생략 행보는 ‘은둔의 지도자(Reclusive leader)’로 불렸던 김정일을 닮은 것인데, 집권 이래 일관해온 ‘김일성 아바타’ 우상화 전략과도 어긋난다.

따라서 김정은의 신년사 생략 배경에는 그럴 만한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 회피다. 신년사 연설을 중단한 시점이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 결렬, 즉 ‘하노이 노딜’ 이듬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과 달리 통치의욕 과시
육성 발표 7년, 2020년부터 생략
정책 실패에 따른 책임 회피인듯

당시 김정은은 4000㎞가 넘는 장거리를 기차로 60시간 이상 달려갔지만, 빈손으로 귀국했다. 이는 ‘무오류의 수령’에겐 씻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김정은 시대의 국가전략인 ‘경제건설과 핵 무력 건설 병진 노선’의 좌절을 의미했다. 스스로 인정했듯이 집권 이후 추진한 ‘경제발전 5개년 전략’은 실패했고, 2021년 새롭게 제시한 ‘경제발전 5개년 계획’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실패를 인민 앞에서 시인하고 그 책임을 떠안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최근 김정은이 “내각의 행정 경제 규율이 극심하게 문란해졌고 국가 경제 사업을 다 말아먹고 있다”며 경제 정책 실패의 책임을 내각에 떠넘긴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둘째, 인민에게 줄 수 있는 희망적 메시지가 없다는 것도 신년사를 회피하는 요인이다. 집권 이후 10년 넘게 모든 국가 역량을 핵·미사일 도발과 고도화에 쏟아부었다. 지난해에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5회를 포함해 미사일을 30여회 발사했다.

7차 핵실험 준비 징후도 보인다. 위기를 극대화해 양보와 보상을 받아내고 경제 회생을 도모하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벼랑 끝 전술’은 한미의 확고한 대응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도발-보상’이 아니라 ‘도발-제재’의 악순환으로 북한의 경제난 심화와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자충수일 뿐이다. 생활고에 내몰린 인민에게 희망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력갱생과 간고한 투쟁만 강요해야 하는 총체적 딜레마 상황에서 신년사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 신년사를 대신한 당 전원회의에서도 합리적 정책 방안에 대한 고민보다는 여전히 핵 무력 강화, 전쟁 준비의 필요성, 남조선 영토 평정 등을 강조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했다. 기존의 ‘강 대강’ 기조를 고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합리적 대안을 갖고 신년사를 재개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잘못(過而不改 是謂過矣)’이라는 논어의 충고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호홍 가천대 겸임교수·한국국가전략연구원·대북전략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