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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홍콩 젠투펀드 사태…권순일 前대법관도 10억 소송 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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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일 전 대법관. 뉴스1

권순일 전 대법관. 뉴스1

권순일(64) 전 대법관의 장인이 ‘홍콩 펀드 투자금 10억원을 돌려달라’며 은행 등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사실상 투자 결정을 대리한 권 전 대법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직접 나와 장인을 도왔지만 은행의 책임을 묻는 데 실패하면서다. 2020년 코로나19 때 환매중단으로 1조원대 피해가 발생한 GEN2(젠투) 펀드에 투자한 돈이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부장판사 김지혜)는 지난해 11월 안경상(88) 전 감사원 사무총장이 하나은행과 삼성헤지자산운용을 상대로 ‘10억원을 돌려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인 장인(안 전 사무총장)이 소송을 제기하고, 대법관을 지낸 사위(권순일)가 증인으로 나선 보기 드문 소송이었다.

장인 노후자금 10억원 투자…코로나19로 3년여 묶여

안 전 사무총장은 2019년 하나은행을 통해 노후자금 10억원을 투자했다. 삼성헤지 자산운용의 ‘전문투자형 사모투자신탁 제3호’펀드를 하나은행이 위탁판매한 것으로, ‘2020년 5월 19일 만기, 기대수익률 연 3.3% 내외’를 내건 상품이었다. 그러나 2020년 7월 투자처인 홍콩의 사모펀드 운용사(GEN2파트너스)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글로벌 채권시장의 유동성이 최저 수준’이라며 주식 환매 중지를 선언하면서 돈이 고스란히 묶였다. 이 환매중지 조치는 2021년, 2022년 잇달아 연장돼 아직까지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안 전 사무총장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2021년 3월 하나은행에 ‘계약을 해제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내용증명을 보냈고, 그후에도 돈을 돌려받지 못하자 2021년 4월 결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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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대신 투자, 동석한 사위가 투자 결정권자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 청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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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안 전 사무총장의 계좌에서 투자한 10억원을 놓고 다툰 소송이지만, 실제 은행에 가서 투자 상품 설명을 듣고 계약을 맺은 건 안 전 사무총장의 딸 안모씨와 권 전 대법관이었다. 두 사람은 2019년 4월 9일 하나은행 법조타운지점을 방문해 젠투 펀드의 수익증권을 매수하는 집합투자증권 거래계약을 체결했다. 이 때는 권 전 대법관이 대법관으로 재직 중이던 시기였다.

 안 전 사무총장 측은 "펀드에 운용자산 회수조건(트리거 규정)이  있는데도 고지받지 못하고 계약을 체결했다"며 "기망, 착오로 맺은 계약인데다 하자가 있는 상품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제 의사를 밝혔고, 계약해제 의사를 밝혔는데도 돈을 지급하지 않은 채무 불이행 상태이니 이를 이행하라"고 주장했다.

주된 쟁점은 ‘하나은행이 투자상품의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는지’였다. 그런데, 안 전 사무총장 본인 혹은 법적 대리인인 딸이 아니라 동석한 사위 권순일 전 대법관이 투자 결정권을 가졌던 점이 패소의 한 원인이 됐다.

재판부는 ‘결정권을 가진 권순일’을 기준으로 은행의 설명의무를 판단했다. 판결문에 ‘금융투자상품에 대한 권순일의 이해도’를 5번이나 언급하며 “금융투자상품은 원래 불확정요소에 의한 위험이 수반되는데, 권순일은 집합투자에 수반되는 투자위험에 관해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고 원금손실 가능성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권순일은 증권투자 관련 논문을 작성, 발표한 점도 있는 등 금융투자상품에대한 높은 수준의 법적 지식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전문성에 기초해 부실투자 위험을 걸러낼 분석능력, 투자위험 감수능력 등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허위 설명만 듣거나, 투자제안서를 받지도 못한 채 착오로 계약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매사인 하나은행 측의 손을 들어줬다.

권 전 대법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정기예금과 펀드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펀드와 금융투자상품에 가입한 경험이 많다”고 증언했고, 당시 상품을 권유, 소개하고 계약서를 쓴 하나은행 직원이 “주요 결정권자는 권순일이었고, 투자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높은 위험등급의 상품이란 걸 설명했고 (만기 예정이었던) 1년 1개월 내에 부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상품에 가입했다”고 증언한 내용도 받아들여졌다.

1심 법원 “투자 책임은 원칙적으로 투자자에게”

법원은 투자상품 자체 혹은 서류 자체에 결함이 없고, 하나은행이 설명의무도 다 한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은행이 설명하는) 구체적 투자대상이나 위험성 평가 등은 불확실한 장래의 사실에 대한 기대·예상에 불과하고 투자 위험은 원칙적으로 원고가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며 “권순일은 자신이 대리해 투자하는 이 사건 펀드 기본 구조에 대한 내용을 제대로 확인할 책임이 있는 등 이 역시 원고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류에 체크 표시를 했는지, 초고령투자자 관련 서류를 교부·확인했는지, 펀드 상품제안서를 줬는지 등 계약 현장에 있던 사람만 알 수 있는 정보를 놓고도 다퉜지만 안 전 사무총장 측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 전 사무총장 측이 항소해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을 진행할 예정이다.

홍콩계 젠투펀드, 피해액 1조원 아직도 미해결

젠투 펀드는 홍콩에 위치한 헤지펀드 자산운용사 젠투파트너스가 설계한 사모펀드다. 젠투파트너스는 국내 은행과 금융투자회사 등을 통해 모집한 자금으로 투자 수익을 내고, 이를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는 수익증권 형태로 설계한 상품을 2018년 9월부터 판매하다가 2020년 7월 환매중단을 공표해 이른바 ‘젠투 펀드 사태’를 일으켰다.

2020년 8월 금융감독원이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6월 말 기준 국내 젠투펀드 판매·투자 금액은 총 1조808억원, 환매 중단 금액은 1조125억원이다. 신한금융투자가 판매한 펀드가 4200억원으로 가장 많고, 삼성증권(1451억원)‧우리은행(902억원)‧하나은행(428억원)‧한국투자증권(179억원) 등 총 729명의 투자금이 묶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령 가입자가 많아 노후 자금이 묶인 경우가 다수라고 한다.

금감원 제재 진행 중, 판매사는 화해 추진

시장에서는 젠투펀드를 ‘제2의 라임 펀드’로 비유하기도 한다. 금감원도 나서서 젠투펀드 국내 판매사들에 대해 조사와 제재 절차를 진행 중이지만, 홍콩의 사모펀드 운용사가 설계해 구체적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렵고, 대응 조치를 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판매사가 투자자들에게 돈을 일부 돌려주고 사건을 종결짓는 ‘사적 화해’ 절차로 사태를 마무리 짓는 경우는 있다. 신한금융투자는 투자자들에게 원금의 40%를 반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고, 한투증권은 투자금의 100%를 돌려주기로 했다. 우리은행도 자율 조정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하나은행은 안 전 사무총장의 사건에서 투자금의 80%를 돌려주겠다는 화해 제안을 했다가 결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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