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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 3학년, 실제 문과생은 10명뿐"…강남은 문과 소멸 중 [입시에 뒤틀리는 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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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자율형사립고 휘문고는 올해 3학년 12학급 중 10학급에 ‘이과 수학’으로 불리는 미적분 과목을 개설했다. 현재 고등학교에 문·이과반 구분은 없지만, 대입에서는 여전히 수학 확률과통계 선택자를 문과, 미적분 및 기하 선택자를 이과로 분류한다. 휘문고는 내년 미적분 학급을 1개 더 늘릴 계획이다. 확률과통계를 가르치는 학급은 하나만 남는다. 이 학교 관계자는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아 점점 이과생들이 늘고 있다”라며 “그나마 하나 남은 문과반에서도 15명 정도는 운동부 학생들이라, 실제 문과생은 10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다음날인 지난달 17일 대구 수성구 정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수험생들이 가채점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다음날인 지난달 17일 대구 수성구 정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수험생들이 가채점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능에서도 '문과〈이과' 역전  

학교에서 문과가 사라지고 있다.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문·이과 구분을 없앴고, 2022학년도 수능부터는 문·이과 통합 수능을 도입했지만, 고교에서는 이과 비중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의대 등 이과 선호 현상 뿐만 아니라 현행 수능 제도가 이과생에게 유리하다는 점도 이과 확대 추세에 불을 붙였다. 이런 모습은 교육열이 높은 강남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교육계에서는 대입 제도에 학교 교육까지 뒤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과가 쪼그라드는 모습은 휘문고만의 얘기가 아니다. 중앙일보가 강남서초교육지원청의 일반고·자율형사립고 26곳(숙명여고는 미공개)의 3학년 교과 진도 현황을 조사한 결과, 강남구 16개교 173학급 중 106학급(61.3%), 서초구 10개교 113학급 중 64학급(56.6%)이 이과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특히 자사고 5곳(세화·세화여·휘문·중동·현대고)은 59학급 중 44학급(74.6%)이 이과 수학반이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학교 성별로는 남고 학급 109개 중 79개(72.5%), 여고는 69개 중 39개(56.5%)가 이과 수학반으로 분류됐다. 과거 문과 위주였던 여고에서도 이과가 더 많아진 것이다. 강남구의 일반고인 진선여고 관계자는 “예전에는 문과가 7학급, 이과가 4학급이었는데 통합수능이 2022학년도 입시부터 도입되며 문·이과 수가 역전됐다”고 말했다. 진선여고는 올해 3학년 11학급 중 7학급이 이과 수학 과목을 개설했다.

전국적으로도 이과 쏠림 현상이 포착된다. 수능에서 이과 수학을 선택하는 수험생은 2019학년도까지는 30% 안팎에 그쳤다. 하지만 2023학년도 수능에서는 45.4%로 이과 수학 선택이 높아졌고, 2024학년도에는 51%로 문과 수학 비율을 처음으로 역전했다. 탐구영역 선택을 기준으로 해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사회탐구 응시자는 2009학년도 59.6%였는데, 2024학년도 수능에선 46.5%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과학탐구 응시자는 34%에서 49.7%로 늘었다.

이미 학원들은 늘어난 이과 수요에 맞춰 대응하고 있다. 메가스터디,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 대형학원 관계자는 “문과생은 10명 중 3명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다 이과생”이라고 입을 모았다.

“문과 성향 학생도 이과 선택…대학 간판·직업 서열 우선”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전문가들은 이과 쏠림 현상이 학생 적성이 아닌 대학 간판이나 직업 서열에 따라 이뤄지는 게 문제라고 본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이공계 분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과생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도 “이과생들이 단지 학교 간판을 올리기 위해 상위권 대학 인문계열에 진학하는, 이른바 ‘문과 침공’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남의 한 자사고 관계자는 “학생들의 적성 검사를 해보면 문과 성향을 가진 학생이 40% 가량 나오는데, 실제 문과를 선택하는 학생은 그보다 훨씬 적다”며 “적성과 달리 의약학계열에 가려는 학생들이 많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은 지난달 발표한 ‘학생의 직업가치 변화’ 리포트에서 “학생들이 진로 선택 시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했다. 리포트에 따르면 의사를 희망 직업으로 꼽은 학생들의 선택 이유 1순위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2018년)’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서(2022년)’로 바뀌었다.

정성훈 교육부 인재선발제도 과장이 10월 25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열린 2028대학입시제도 개편 시안 학부모설명회에서 입시제도 설명을 하고 있다. 뉴스1

정성훈 교육부 인재선발제도 과장이 10월 25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열린 2028대학입시제도 개편 시안 학부모설명회에서 입시제도 설명을 하고 있다. 뉴스1

교육계에서는 이과 선호 현상에 기름을 부은 것이 현행 입시 제도라고 지적한다. 강남권 교사들은 “통합수능이 시작된 2022학년도 입시부터 이과 쏠림이 본격화 됐다”고 입을 모았다. 통합수능을 도입하면서 문·이과생이 한 그룹으로 섞여 점수를 받게 됐는데, 선택과목에 따른 표준점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올해 수능에서도 이과생이 주로 보는 수학 미적분은 만점을 받을 경우 표준점수 148점을 받았는데, 확률과통계 선택자는 만점을 받아도 137점에 불과해 만점자 간의 점수 차가 11점 벌어졌다. 경북의 한 고교 수학 교사는 “실제 진학 지도 때도 미적분을 선택해야 입시에서 유리하다고 설명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철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장은 “통합수능 이후 꾸준히 미적분 선택자의 점수들이 높기 때문에 아무리 이공계열 대학이 확률과통계 응시자에게 문호를 열어도 미적분 응시자가 우위에 있다”며 “현 수능 체제에서는 비슷한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제영 교수는 “선택과목을 없앤 2028학년도 수능 개편안이 확정되면 문·이과 격차가 다소 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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